좋은 수필

성형시대 / 김만년

희라킴 2019. 4. 1. 18:40



성형시대 


                                                                                                                               김만년


 아이가 엄마를 닮았다는 말도 이제는 옛말이 된 것 같다. 뜯어고치는 것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인간이 조작되고 변형되는 시대다. 인간의 조물주가 외과의사가 된지도 오래 된듯하다. 이런 추세라면 똑같은 유형의 미인들이 대량복제 되는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일까. 실제로 요즘 나는 아이돌가수들의 얼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미인의 전형이 도식화된 듯, 얼굴 말 표정까지도 똑같으니 어찌 구분이 쉽겠는가. 마치 참새들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모두가 동글동글하고 예쁘다. 예쁘기는 하나 웅숭깊은 개성미가 없다. 꽃은 꽃이되 향기 없는 꽃 같다는 느낌을 든다. 미녀는 많되 미인美人은 드문 시대다.

 


 성형이 더 이상 숨길 필요도 부끄러울 일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몇몇 방송프로그램에선 성형이 필요한 사람들을 경쟁적으로 출연시킨다. 마치 재단사가 옷을 재단하듯이 의사가 세세한 인지도人地圖까지 그려가며 신체부위별로 견적을 뽑는다. 그리고 상업주의와 맞물려서 그 변신의 성공담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있다. 성형이 현대에선 성공의 선결조건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성형의 긍정적인 효과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 자식을 좀 더 반듯하게 사회로 진출시키려는 부모의 마음이 이해될 법도 하다. 그러나 늘 과유불급이 문제다. 성형중독증에 결려 인생을 망치는 사례도 가끔 보았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모들은 낫다. 문제는 성형이 꼭 필요한데도 경제적여건 때문에 성형을 하지 못하는 가난한 청춘들의 좌절감이다. 그런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떨까.

요즘 들어 개명바람도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이름도 성형시대에 접어든 것 같다. 어감이나 뜻이 너무 촌스럽거나 오해를 받을 만한 이름이면 개명을 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괜찮은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물론 건강과 재운을 이름 탓으로 돌리는 작명가의 부추김도 한몫 했을 성 싶다. 나 역시 이름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년滿年’, 이란 이름은 한 해를 꽉 차게 살라는 뜻이다. 뜻은 좋지만 어감이 별로다. 상대편이 ‘연’자로 종종 오기할 때도 있고 어릴 땐 ‘천년만년살고지고’로 놀림을 받을 때도 많았다. 안동김씨 본本에 오행五行을 기본 축으로 짓다보니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촌들 이름 역시 ‘일년, 중년, 풍년, 억년, 광년......,’등등이다. 왠지 풋! 하고 웃음이 난다. 가끔 문우文友들도 이름을 시詩적으로 좀 고상하게 바꾸어보라고 농 삼아 권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때 철의 향기, 즉 ‘철향鐵香’이란 필명을 써 본적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대로 쭉 가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이고, 또 이름에는 그 사람의 생의 이력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왠지 개명하는 순간 내 다난했던 추억과 삶의 지문들도 함께 사라질 것만 같다.

조작되고 변형되는 게 어디 그뿐이랴. 강물도 다림질해 놓은 것처럼 쭉 뻗어있다. 시멘트로 분장한 방죽이 교도소 담장처럼 근사하다. 매끈하게 뻗은 보와 아치형의 철제 다리들이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고 있다. 역시 성형미인이란 생각이 든다. 치수治水의 수준을 넘어 온 하천이 시멘트로 깁스를 한 것 같다. 회색빛 콘크리트가 복제 그림처럼 천편일률적이다. 거기 따뜻한 인간의 풍정風情이 들어앉을 자리는 없다. 강물은 굽이쳐 흘러야 제 맛이다. 어머니의 휘늘어진 열두 폭 치맛자락처럼, 때론 소용돌이치고 때론 유장하게 흘러야 강다운 강이다. 흐름이 끊긴 자리에 생명은 없다. 침전물이 부유하고 고기들이 죽어가고 있다. 해오라기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삼각주와 늪도 사라졌다. 모래톱도 물속으로 얼비치던 미루나무도 염소의 말뚝도 사라졌다. 버들치를 잡으며 뭉게구름을 좇던 내 유년의 추억도 함께 사라졌다. 휘파람을 불며 방죽을 걷던 은유의 숲이 사라진 것이다.

성급하게 깎아 만든 저 늘씬한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닌 듯싶다. 어쩌면 시멘트로 분장된 거대한 위선의 강이 아닐까도 싶다.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집도한 또 다른 성형미인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자연과의 공존을 피폐시킨 개발중독, 또 다른 성형중독증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래서 인간의 파괴적 속성을 꼬집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호모 라피엔스(Homo Rapiens), 즉 “약탈하는 사람”이라고 명명했다. 천지동근天地同根이라는 법어가 있다. 하늘과 땅, 자연과 내가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오늘 내 마음이 쓸쓸한 것도 지구 반대편에서 나뭇잎 하나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했지 않은가. 자연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다. 녹조와 시멘트 독에 부유하는 고기들을 보면 내 마음이 아픈 것이다. 하늘 아래 뭇 생명들은 저마다의 존재이유가 있다. 적어도 인간의 풍요가 고기들의 삶터를 강제철거 하는 저 강물에 있지는 않아야 한다.

 어쩌다가 도회의 부촌을 지나다보면 담장 너머로 매끄럽게 깎인 잔디나 정원수들이 보인다. 역시 성형가위로 잘 재단된 인조조형물들이란 느낌이 든다. 팔 잘린 노송이나 지주목에 괴인 관목들을 보노라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어쩌다가 뿌리 채 뽑혀 온 생이 되었는지. 나무들이 잔병치레하는 아이마냥 생기가 없어 보인다. 대지의 기운을 잃어버려서일게다. 달빛 별빛, 풀벌레 소리까지 흠뻑 머금고 청공으로 우람한 팔을 벌리고 선 나무라야 나무답다. 강은 강대로 돌은 돌대로 삼라만상이 자연 그대로일 때가 좋다.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했지 않은가. 그런 것이 좋아 보이는 나이에 와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마당이 있는 집을 좋아한다. 마당도 그 집 주인처럼 늙수그레한 마당이 좋다. 듬성듬성 잡초들이 자라고 담장엔 금부처 같은 호박 몇 덩이쯤 굴러다니는 마당이면 더욱 좋다. 온종일 묵은 닭들이 구구대고 멀구슬나무나 키다리 수숫대들이 오가는 길손에게 손짓하는 마당, 그런 집은 십중팔구 찌르레기나 풀벌레들이 주인행세를 한다. 그런 집 평상에 앉아 옥수수 피리나 불며, 그렇게 울퉁불퉁 생긴 대로, 지어진 이름 그대로 ‘만년’ 동안 살고 싶다. 풀벌레 우는 쪽으로 귀 열어두고 바람이 집도한 풀잎 검劍으로, 나는 날마다 마음을 성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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