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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에 있어서의 철학 용어 / 고봉진

희라킴 2018. 10. 7. 18:41


수필에 있어서의 철학 용어 


                                                                                                                   고봉진


  우리가 글을 쓰려고 할 때는 먼저 자기와 대화를 시작한다. 자기가 누구인가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우선 들여다보고, 그 다음에 자기 주변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떤 경험세계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와의 문답을 진행해 가며 글을 써 간다.


  이러한 대화는 어떤 종류의 글을 쓸 경우이든 거의 마찬가지지만, 특히 수필의 경우에 시종始終 자기와의 대화가 그 글을 써 가는 일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때, 자기나 자기주위를 새삼스럽게 다시 찬찬히 둘러보는 것은 흔히 타성적으로 인식해 왔던 세계를 한 걸음 넘어서서 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방학이 되어 일기쓰기 과제를 받으면, 흔히 '오늘 아침은 몇 시에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하는 식으로 기술하는 세계, 그와 같은 일상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그 근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려는 마음의 여행이기도 한 것이다.


  몽테뉴가 《엣세essais》라는 책을 쓰면서, 그 서문에서 밝힌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이 글은 '자기에 대한 시험essai', 즉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알 수 있는지를 탐색해 보는 '자기와의 대화'로 이루어진 글이라는 점이었다.


  수필의 이러한 성격은 흔히 '철학적'이라고 일컫는 면을 지녔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를 정확하게 또 효율적으로 그려내려는 욕망은 당연히 '철학 용어'에 대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철학 용어의 힘을 빌리면, 그러한 세계를 좀 더 깊이 있게 잘 표현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철학 용어'를 사용하려고 할 때는 몇 가지 점에서 세심한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철학 용어는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어휘와는 달리 하나 하나가 복잡한 역사적 성립 배경을 지닌 말이라는 점이다. 나무로 말하면 순탄하게 죽 뻗어 곧게 자란 나무가 아니고, 마치 분재한 나무처럼 복잡하게 꼬여 자란 나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철학 용어를 문장 속에 쓰는 일은, 마치 집을 짓는데 익숙하게 다루어 온 반듯한 재목을 쓰지 않고, 고약하게 뒤틀린 재목을, 그것도 그 결을 살려 쓰려는 것과 같이 아주 어려운 일이 된다. 같은 용어도 역사적으로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다양한 뜻으로 사용이 되어 서로 상반되는 뜻을 지니기도 한다. 희랍어 이데아ἰδέα와 같은 경우는 영어로 idea, 독일어로 Idee라는 한 단어로 번역 사용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이데아, 이념, 관념, 이상 등등으로 경우에 따라 달리 번역한다. 그렇지만 같은 번역어도 누구 철학 속의 말이냐에 따라 다 의미하는 바가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문맥 속에서 혹은 어떤 세계관의 전제 속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갖는 말도 흔하다. 따라서 그런 말을 쓸 때는 자신이 그러한 하나의 견해나 입장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 철학 용어의 한문 표기는 그에 대응하는 서양 원어를 가리키는 한갓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점이다. 철학 용어의 대부분은 일본 사람들이 한자로 옮긴 역어이지만, 그 한자 표현이 완벽하게 의역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면 본체本體, 실체實體, 실재實在, 실존實存이니 하는 말과 명제命題, 자아실현自我實現 같은 말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러한 말들은 한문에 익숙한 사람들이 자주 오용을 한다. 사용된 글자들의 자의字意를 연결만 하면 그 뜻이 되리라고 짐작을 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가장 오용이 잦은 '명제'란 말은 논리학 용어 'proposition'을 옮긴 것으로, '어떤 판단을 말로 나타낸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의문문이나 명령문, 감탄문은 명제가 될 수는 없다. 또 '사명'이니 '과제'니 하는, '해야 마땅한 일'을 뜻하는 말과 혼동을 해서도 안된다. 


  한자로 옮겨진 '철학哲學'이란 말 자체도 '철哲'이라는 글자 때문인지 상당히 복잡한 이미지를 지닌다. 그래서 흔히 점술사도 자기의 점술을 '철학'이라고 칭한다. philo-sophia愛智란 고대 그리스 말을 '철학'이라는 말로 옮긴 사람은 일본의 19세기 학자 니시 아마네西周이다. 그는 그 말을 '현철賢哲을 희구한다'는 뜻으로 해석, '희철학希哲學'이라고 번역했었다. 그것이 뒤에 희가 떨어져나가 '철학'이란 간략한 말로 정착을 한 것이다.


  일본인이 번역한 철학 용어 중에 '형이상학'과 같은 중국 고전《역경易經》에 근거를 둔 좋은 번역어도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 utiltarianism니 실용주의 pragmatism니 하는 그들의 번역어는 잘못 명명된 표본적인 것으로, 그것이 그 사상에 대해 그릇된 선입견을 갖도록 하고 있다.


  셋째, 철학 용어는 한동안 논리실증주의의 파괴적 공격을 받았다. 많은 말들이, 특히 형이상학 또는 윤리학에서 사용하는 어휘와 가치언어들이 그 진위나 사실검증이 불가능한 소위 '무의미'한 것으로 판정받았던 점도 일고할 가치가 있다.


  사실, 말 가운데는 정확한 논리적인 의미가 없거나 사실로 뒷받침 되지 않는 헛소리도 많다. 그런 의심이 가고 애매모호한 말을 우리가 구태여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점에 유의를 하고 적절한 말을 잘 선택해서, 적합한 경우에 사용한다고 하자.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철학적 학술 논문을 쓰는 것이 아니고 수필을 쓰고 있다는 기본 입장이다. 철학 논문이 아니라면 구태여 철학적인 어휘를 많이 사용하여 같은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만 친숙한 글을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 편의 글에 너무 많은 철학 용어를 사용하면, 우선 현학적이라는 인상을 줄 위험이 많다. 또 사람은 말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런 철학 용어를 자주 사용하다보면 자기 고유의 참신한 생각을 펼치기보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틀에 박힌 낡은 유형의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는 위험도 따른다.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서양 수필의 본격적인 고전으로 꼽히는 몽테뉴의《엣세》나 철학자 베이컨의 수상집 《에세이》를 읽어 보면, 깊이 있는 사유가 담겨 있으면서도 철학 용어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 일본의 종합잡지《문예춘추》에 오랜 기간 권두수필을 썼던 철학자 타나가 미치타로田中美知太郞의 글도 그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우송友柗 선생님의 수필이 그 본보기가 된다. 선생님은 '철학'을 '철학한다'는 동사로 이해하도록 권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물을 보다 깊이 있게, 넓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철학적인 사색을 한다고 꼭 철학 용어가 빈번하게 출몰을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수필계에서도 6, 70년대 한때 별나게 '운명'이니 '실존'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쓰기 좋아했던 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유행어에 지나지 않았고, 이렇다 할 작품도 남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필에서 철학 용어를 애써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적절히 잘 사용된 철학 용어나 철학적인 표현은 우리의 글에 그윽한 깊이와 무게를 준다. 다만 잘못 인용되거나 남발된 철학 용어가 글 전체의 신뢰성과 품위를 떨어트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고 절제하자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