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2회 포항스틸에세이 금상] 쇠절구 / 정영조

희라킴 2018. 10. 18. 18:25


[제2회 포항스틸에세이 금상] 


쇠절구 


                                                                                                                                    정영조


 마침내 유연해져 익어갔다. 서리서리 풀어지고 한 겹 한 겹 껍질이 벗겨진다. 오래되어 주름지고 닳아도 먼 곳에서 보는 원숙한 자태에 눈길이 멈춰진다. 왁자지껄하게 내지르지도 빈속을 울려 나둥그러지는 일이 없다. 묵묵하게 앉은 기억은 옭아 묶은 매듭 하나를 푼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친정집 대문 안 마대자루가 줄지어 서 있다. 눈에 익은 자루를 보고 발걸음이 무심해진다. 내 뒤를 따르던 딸이 자루에 담긴 물건을 호기심에 묻는다. 가게와 붙어 있는 친정집에 방앗간이 있다. 가던 걸음을 멈춰 고개를 돌려 속을 보지 않고 , 깻묵이야답을 했다. 아이는 깨로 만든 묵이면 말랑하지 않고 저렇게 단단해 라며 되묻는다. 단단한 껍질을 깨고 보드라운 살을 내줌의 말미는 시커먼 껍질만 뭉쳐져 버려지는 일이 깻묵만이 아닌 것에 걸음이 더디어진다.


 이른 아침부터 대청마루에 연기가 스민다. 가을에 오면 아버지는 집과 붙어 있는 가게 문을 일찍 연다. 연탄불을 지펴 널따란 솥에 깨를 가득 부어 볶는다. 뽀얀 색 깨가 열기에 이리저리 들들 볶인다. 아버지는 깨를 볶을 때 솥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찰나를 지나쳐 버리면 쓴맛과 고소한 맛의 선이 넘나들기에 예리하고 속을 꿰뚫는 눈이 된지 오래다. 솥에서 피어난 연기가 집안까지 드나들 때면 아버지의 등은 땀으로 흥건해진다.


 기름을 짜는 기계에서 줄줄 기름이 흐른다. 품 넓은 방앗간주인의 손은 고인 곳에 남는 기름도 여차 없이 끌어 담는다. 갓 짜 나온 기름의 고소함은 병마개를 닫아도 향내를 풍긴다. 기름과 같이 나온 것이 또 있으니 단단한 깻묵이다. 다갈색 기름과 같이 깻묵도 짙은 다갈색이다. 손님들은 찰랑찰랑 소리 내는 기름이 담긴 병을 장바구니에 담기 바쁘다. 속을 내준 원판모양인 둥그런 깻묵은 가져가지 않는다. 아버지는 주인 잃은 깻묵을 가게 구석진 곳에 차곡차곡 쌓아 둔다.


 높이 쌓여가는 깻묵은 두께만큼 쉽게 깨지지 않는다. 단단하게 눌려져 둔탁한 소리를 내는 깻묵은 쇠로 된 절구로 찧어야 가루가 된다. 낱알의 결집이 저렇게 단단한 모양이 되어 뭉쳐진 것이 아버지의 고집이 묻어 보인다. 그릇된 것을 보고 서슴없이 말하는 고집, 자식에게 바라는 기대를 굽히지 않는 고집이 담금질이 더해진 쇠처럼 단단하다. 아버지의 기대가 점점 짓누르며 조여 오자 장남인 오빠는 빠져 나갈 궁리에 빠진다


 며칠째 아버지의 한숨이 잦아졌다. 방앗간과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오빠 방이 냉골이 되고 있다. 쉬이 타지 못하고 꺼진 연탄재가 밤새 까맣게 주인 방을 지키고 서 있다. 아버지는 밖으로만 도는 오빠를 따끔한 회초리로 경을 치기도 하고, 보드라운 솜처럼 감싸 안아 오빠의 들썩이는 발걸음이 잠들기를 기도했다. 오빠는 숨 쉴 틈도 없이 조여 오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열없이 식은 방처럼 차가워져 갔다.


 해가 기울어 서늘한 공기가 방앗간 안에 맴돈다. 전기 스위치를 내린 방앗간에 쿵 쿵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먼지를 털고 깻묵을 쇠절구에 빻고 있다. 엉덩이를 보여 돌아앉은 아버지 등에 그늘이 졌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숨이 쇠절구 속에서 쿵 쿵울음이 되어 터진다. 점점 쇠절구소리는 굿거리장단처럼 느려지며 넓은 아버지 등이 들썩이기 시작한다.


 가게 한쪽 구석에 깻묵과 같이 자리한 쇠절구는 좀처럼 모습을 잘 내보이지 않는다. 가끔 절구 위로 거미가 내려와 줄을 치기도 하고, 기운 없는 먼지가 내려앉는다. 속이 깊고 넓은 쇠절구는 쇠공이의 무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묵직하다. 아버지의 손에 이따금 이끌려와 단단히 다져진 깻묵을 찧는다. 결집의 순간은 잊으라는 듯 쇠공이가 쿵덕대자 산산이 흩어진다. 처음부터 기름때를 묻힌 듯 쇠절구의 겉은 까만 갑옷을 한 겹 두르고 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아버지가 돌아보았다. 촉촉한 눈가와 코끝이 붉은 얼굴로 나를 보며 진한 쌍꺼풀눈에 웃음을 담으신다. 우리 딸 왔나 하며 손을 꼭 잡는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깻묵가루를 담아 집안 화단에 거름을 했다. 하나씩 높이를 더하고 있는 깻묵이 절구 속으로 들어가 겹겹이 다져진 것을 풀어냈다. 아버지의 절구질은 고집하던 자식에 대한 바람을 한 겹씩 벗기고 풀어내는 일상이었다.


 돌아보니 나도 아버지 속을 절구질한 자식이었다. 닭고집인 아버지에게 내 쇠고집은 비길 수가 없었다. 고생이 눈에 선한 맏며느리 자리를 고집하며 내 속만 채웠다. 아버지가 바라는 것을 마다하고 내가 원하는 것만으로 채워 살아도 될 것 같았다. 내 속을 알아주지 않는 아버지가 마음에 그렇게 한 겹 한 겹 두른 소원의 끈이 고집이라 고집했다.


 아버지의 딱딱한 속이 또 허물어졌다.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처럼 네가 좋다는 사람과 결혼하라며 마른 손을 놓았다. 겨울 볏짚처럼 마른 아버지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식의 마음을 더는 잡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룽어룽 눈물을 머금고 질긴 쇠고집 딸 앞에 한 겹 고집을 풀었다.


 여지없이 맏며느리의 자리는 언 땅에 선 맨발처럼 시렸다. 시댁에서 부는 바람에도 내 엉덩이가 시렸다. 그럴 때 마다 내 머릿속은 아버지를 찾았다. 단단한 고집을 깨지 않는 딸의 마음에 금이 가고 뭉그러지는 것을 알고 있으실지. 내 속은 수년 동안 다져온 고집을 풀지 못하고 불협화음로 절구질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부모는 속을 자식에게 내어주고도 다져진 껍질마저도 쿵 쿵 찧어 잘 스며들게 해야 한다는 것을. 고삐같이 팽팽하게 묶은 매듭을 자식에게는 벗기고 푸는 손길이 서슴지 않았다


 아버지의 쇠절구는 한 쪽 그늘진 구석에 놓여 있다. 기름때를 묻힌 쇠절구와 공이는 주인 손의 온기를 잃은 지 수년이 되었다. 까만 손때가 지워지지 않은 쇠공이에 아버지의 온기가 묻어 있을까 손에 들어본다. 묵직한 무게로 단단한 깻묵에 닿던 쇠절구와 공이가 한숨같이 또 그렇게 쿵 쿵 소리를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