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또 들어 볼튜? / 전민

희라킴 2018. 3. 18. 20:57


또 들어 볼튜?

                                            

                                                                                                                                     전민


  말머리 풀기 전에 먼저 신사임당 한 장 내놨슈. 바로 들어갈게유. 밥은 뜸을 들여야 맛있는데 말은 그렇지 않더라구유. 지가 <줌마니들 볼튜>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지 않남유. 그러니까 이건 2탄이 되겄네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입에 가시풀이 돋을 것 같아서 그류. 한번 들어 볼튜?

 

 세 살 무렵 고개를 발딱 젖히고 까치발을 들어 하늘의 구름을 따다 빵을 맹글어 주겠다던 손자 눔이 풀쩍 커서 그새 핵교를 갔구먼유. 세월 참 빠르유. 이제 삼학년이 되었슈. 키가 얼마나 큰지 저랑 얼추 비슷허유. 심(힘)도 여간 세지 않아서 허깨비인 이 할미는 걍 주먹 한방에 날릴 것 같유. 헌디 이 눔이 나날이 한 차원 다른 버전으로 지를 놀래키지 뭐유. 눔이 감동을 주는 데는 아주 선수유, 선수. 지가 녀석헌티 해준 거라곤 태몽 꿔준 거하고 갓난쟁이 때 일 년가량 공력을 들인 거 밖에 웂는디 과분한 보상을 받으니 판을 깔지 않을 수가 웂네유.

  

 어려서 할머니 소리를 내지 못해 함니라고 부르던 녀석이 접때는 그러는규. 지가 통장에 모아놓은 돈이 백 육십 만원이 있는데 그걸로 할머니한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고 싶다구유. 할미 손에 구리반지 하나 얹혀있지 않은 것이 제 딴엔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유. 순간 코끝이 찡해지면서 가심이 뭉글하데유. 너울지는 가심팍을 지그시 누르고 지가 감탄사를 쏘아올렸지유. 히야, 우리 현규가 최고다! 하늘과 땅 사이 할머니 생각해주는 사람은 현규밖에 웂구먼. 그치만 할머닌 네가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워다 줘도 다이아몬드로 알고 있을겨. 그랬더니 아, 이눔이 턱하니 스마트폰을 열어 손가락을 번개같이 놀리더니만 종이에 역삼각형 모양의 큼지막한 다이아를 번쩍 그려서 주질 않것슈. 일단 먼저 받으라고 하면서 약속증서라나 뭐라나 허데유. 샘물 같은 그놈 마음에 제 마음이 닿아 되비치니 삽시간에 둘레에 무지개가 뜨더라구유.

  

 주말은 대개 그놈들 우당탕 가족이 집으로 와 복대기를 치지유. 그날은 점심을 먹고 즈이 할아버지 일터가 있는 상가로 가데유. 거기서 한참 시간을 보내나 싶더니 미주알고주알 제 속내를 엔간히 드러냈나 봐유. 그중 흘린 얘기 하나를 주워 담자면, 저는 집과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다고 하면서 빨리 커서 넓은 아파트를 사고 싶다고 하더래유. 아따! 즈이 할아버지가 놀라서 반색을 하고 물었대유. 왜, 지금 살고 있는 너희 집이 좁아서 그러니? 헌디 눔이 그게 아니라면서 도래질을 치더래유. 아, 글쎄 80평 아파트를 사서 할머니한테 선물하려고 그런다고, 그게 꿈이라고 했다나유. 세상에나 만상에나 이런 손주 둔 사람 있으면 나와들봐유.

  

 이게 다가 아니유. 남들은 손주가 커갈수록 정을 안 줘서 서운타고 하더구먼서도 눔의 할미 사랑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유. 머스매들 거짐이 그렇듯 녀석도 어려서부터 차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곤 했슈. 제가 성탄절이나 어린이날, 생일 때 지하철 모형이나 불자동차 포크레인 지게차 같은 장난감을 사주곤 했쥬. 이제 그 시기는 지났는데 얼마 전엔 녀석이 난데웂이 전화를 해서 대뜸 그러더라구유.

   

 “할머니! 할머니는 무슨 차가 제일 좋아? 나는 포르쉐가 좋은데...”

  

  얼결에 나는 기양 입에서 나오는 대로 ‘벤츠’ 라고 대답했쥬. 그러고선 얼추 한 달쯤 되었을라나. 딸이 놀러 와서는 그러는규. 엄마는 좋겠어. 현규가 그러는데 저가 차를 사기 전에 할머니가 늙어서 먼저 죽으면 벤츠를 사서 무덤 앞에 세워놓을 거라고 하데. 딸은 웃자고 한 말인데 나는 워치기나 가심이 노글노글하던지유. 얘기가 예서 끝나면 재미가 웂쥬. 속편이 나오유. 그 뒤로 다시 보름쯤 지났을까. 녀석이 집에 왔길래 딸한테 들은 얘기를 꺼내면서 지금도 마음이 변치 않았느냐고 물었슈. 헌디 이 눔이 아니라고 하더라구유. 에라~ 허긴 날씨만큼이나 변덕을 부리는 게 사람 마음이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눈을 지릅뜨는데 곧장 메아리가 들려오더라구유. 뭐랬는지 알유? 암만해도 무덤 앞에 차를 세워놓으면 누가 가져갈 것 같아 땅을 파고 할머니 옆에 나란히 놓을 거라는 거유. 무슨 납량특집도 아니고 증말이냐구유? 얼라, 그럼 지가 뭐하러 그짓말을 헌대유.

 

 글쟁이랍시구 지가 암만 마음을 비웠다고는 하지만 속물근성이 남았는지 속없이 기뻤다니께유. 이만하면 제 인생 성공한 거 맞쥬? 다이아몬드며 벤츠를 이미 받아서 손가락에 끼고, 차를 타고 다니는 거나 다름읎잖것슈. 그 힘을 받아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서도 지는 거기가 벤츠 속이다 생각허유. 게다가 녀석은 무슨 조화인지 할머니만 생각하면 덮어놓고 눈물이 난다잖유. 노상 보고 싶고 노상 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니 워칙허면 좋대유.

  

 한번은 수영을 배우는 마포아트센터에서 셔틀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그만 엉뚱한 데서 내리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대유. 근디 이눔 두렵고 무서워 울먹거리면서도 온통 머릿속엔 할머니 생각밖에 안 났다니 당최 이게 무슨 일이냐구유. 낯선 곳에서 그래도 침착하게 대응하긴 했더라구유. 무조건 큰 가게로 들어가 전화를 빌려 즈이 엄마한테 연락했대유.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데리러오라고만 했다니 월마나 속이 탓것슈. 우여곡절 끝에 모자가 상봉하긴 했는데 만난 즉시 할머니 집에 가자고 졸랐다나유. 그 얘길 전해 듣고서 지가 이튿날 득달같이 그눔 다니는 핵교를 갔구먼유. 이냥 할머니 타령이 과하다보니 어느 날은 딸이 심리상담 받으러 가야는 거 아니냐고 묻더라구유.

  

 그 애와 나랑은 서로 다른 세상을 살고 있지만 수시로 끈끈이 점액질이 엉기는 걸 보면 참 희한허유. 녀석 안의 어떤 것이 그렇게 만드는 걸까유? 물보다 진한 게 피라고 놈의 발가락이나 꼬리뼈 어디 나의 세포유전자도 쬐끔은 섞여 있어서 그럴 테쥬. 그나저나 이 정도 자랑질을 헐라믄 저 돈 가지곤 안 되겄쥬? 맞유. 저는 염치라는 걸 아는 사람, 까짓거 여기 사임당 하나 추가유.

  

 나도 내가 이런 칠푼이 노릇을 할 줄은 꿈에도 물렀슈. 사방팔방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막 들리네유. 저 작자도 별 수 웂군! 대책이 있간디유. 혼자 암만 잘난 척 해봐야 늘그막 외롭기만 헐 티고 고독사 예약해놓는 것밖에 더 되남유. 적당히 푼수 떨며 물처럼 흐르는 게 상수다 싶어 그러는 거니 너무 타박허지 마슈. 핏줄에 쐬서 이리 주책은 떨지만 저란 사람이 아직 갈 데까지 가진 않았구먼유. 누가 뭐라 혀두 저는 신식 할머니유. 아침밥을 왜 먹는 줄 알유? 커피 마시려고 먹유. 그것도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머그잔에만 타서 마셔유. 뿐이 아니유. 아까 전에도 왠지 귀가 즐겁고 마음을 잡아끄는 베토벤소나타 31번을 들었구먼유.

  

 언젠가 노 스승께서 제게 그러데유. 니가 새댁인디 할머니 소릴 들어서 워쩐다냐? 아무렴 워뜌. 몸 성하면 되지. 벼라별 종자가 다 많은 세상에서 살만큼 살다보니 삶 자체가 비극이라는 걸 알아버렸지 뭐유. 그찮유? 암만 가족이라도 볼꼴 못 볼꼴 다 보고 살았으니 때로 멀짜나는(넌더리나는) 것도 사실이구유. 그런 고온다습한 사막을 주구장창 걸어야 허는디 워치기 신통방통 꽃 같고 별 같은 놈들이 이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느냐 이 말유, 지 말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아이들 웃음소리라고 허쥬. 산을 바라다보는 나이도 한참 지나 나무버걱이 되어버린 영혼에 지름칠을 하는 녀석이 있어 제가 움츠러들지 않고 살아가는지도 물류. 머잖아 사춘기가 와서 이성에 관심이 쏠리면 나를 워치기 내동댕이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즈이 친할머니와 더 큰 사랑을 주고받을 테지만 뭐 그거까지 생각할 거 있슈. 시방 좋으면 그만이지 무엇하러 후제 일까지 댕겨가지고 산통을 깬대유. 야중은 야중이고 지금은 지금, 뭐라드라 저 ‘카르페 디엠’이란 말도 있잖유. 시간이 바람개비처럼 돌아 휙휙 계절이 지나가고 조만간 개골창에 빠진 찬밥덩이 신세가 된다 해도 이 은밀한 조청맛은 뭣과도 바꿀 수 웂는 귀한 약재임에 틀림웂구먼유. 녀석과 공감하는 시늉을 하려면 땀깨나 쏟긴 허유. 그치만 그 정도 맴도 안 쓰고 어떻게 영양(羚羊)의 짱짱한 살집, 수시로 뿜는 페퍼민트 향, 동굴에 튀어 오르는 물방울 소리 같은 청량함을 맛볼 수 있나유. 여러 말 헐 거 웂이 녀석은 지 삶의 옹호여유.

  

 아즉 할머니 명찰 달지 않은 사람들은 뭔 소릴 허나 싶을거유. 저도 그랬으니께유. 지가 서른 마당에 있을 때 할미 할배 소릴 듣는 가장자리 인생은 삶이 끝난 줄 알았슈. 기운이 줄어 약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걸, 어느 절후나 다 살만하다는 걸 그 쩍엔 어림 못했쥬. 근디 사람은 살아봐야 안다고 이 시절도 기양 괜찮다 싶구먼유. 젊게 살려고 안달 헐 거 웂슈. 그거 개갈 안 나는 짓이더라구유.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 뛰어봤자 벼룩이쥬 뭐. 빛깔만 노랗다고 워디 탱자가 귤이 되든감유? 여하간 늙어빠진 몸에서 싹이 트길 기다리지 말고 저 아래 밑동을 잘 살펴 보자구유. 그 언저리 파릇한 새싹이 돋아 올라오면 다시 생기 충전되는 봄날이니께유.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늙마 젤루 조심해야 할 것이 진(긴)말 늘어놓는 건디 얘기가 길었네유. 얼른 내빼야 되겄슈. 총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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