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대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원보람
악어떼
서른이 지나기 전에 두
번째 실업급여를 받았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햇빛줄기를 나눠먹었고
발끝마다 매달린 검은
노예들도 입을 벌렸다
요즘은 늘 다니던 길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
표지판은 너무 많은 곳을
가리키고
신호등은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만 보내지
도시 곳곳에 설치된
늪지대를 지나다가
영혼을 자주 빠뜨렸다
너무 바쁜 날에는 일부러
나뭇가지에
헌옷처럼 걸어두고 가기도
했다
늪지대에 악어떼가 나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노예들은 밤마다 주인을 뜯어먹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거워지는
노예를 질질 끌다가, 끌려다니다가
악어는 심장부터 먹는 것을
즐긴다고 했다
상자 안에 있는 상자를
열면 나오는 상자 안으로
도시의 아이들이 차례로
들어갔다
사각지대 안에서 조용히
자라는 아이들
뚜껑을 열면 어른이 되어
나왔다
우리는 시급을 받고
늪지대에 숨어
포크를 쥐고 악어떼를
기다렸다
돈을 모으면 함께 열기구를
타자고 했다
뿌리 얽힌 사람들에게
내리는 비를 지나
위로의 말이 들리지 않는
대기를 지나
구름 사이 피는 버섯처럼
둥근 머리로 허공을 밀어
올리며
계속 가자고 했다
추락하는 일에 익숙했으므로
겨울 내내 올라가는
열기구만 상상했다
악어는 울기 위해 먹이를
씹는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1987년 대전출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과졸, 동 대학교 대학원 수료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평범한 시어속 풀잎 같은 날카로움 느껴져"
사람의 눈에 닿으면 동행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말이 있다.
노래가 되고 싶어서 춤까지 추는 언어가 있다. 시인은 그 율려와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다. 그런 노래는 시인의 깊은 마음 바닥을 짚고 나온다.
심사자의 눈과 가슴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시를 기다렸다.
오래된 서당이나 과거시험장의 시가 아니라, 저잣거리와 편의점과 고시원이 즐비한 골목길의 흥얼거림을 원했다. 태초와 시원의 바람이 아니라, 지금
여기 터진 입술과 언 뺨을 때리고 가는 질풍의 시를 기다렸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만만치 않은 시를 읽으며, 심사자들은 긴장했다. 물론 좋은
시만 있는 건 아니었다. 때론 현란하고 모호했으며, 오랜 학습의 지층에 눌려 화석화된 문자도 있었다. 화장이 지나쳐서 돌비늘이 된 언어들도
있었다.
우리는 원보람 시인의 「악어떼」 외 3편에서 싱싱하게
팔짱을 끼는 젊은 숨결을 만났다. 미래의 역량이 느껴졌다 .무의미하고 불분명한 감각으로 사유되는 시의 범람 속에서 그의 시는 오롯했다. 평이한
시어 속에 긴장의 풀잎을 날카롭게 세워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현실을 정직하게 읽을 줄 알았다. 언어와 표현법 뒤에 숨지 않았다. 가슴에 이미
시인의 자세가 자리를 잡은 증거였다. 손끝 재주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 진물과 용광로에 펜을 찍는 당찬 의지에 손을 들어주기로 흔쾌히
합의했다. 풋풋한 결점을 덮기에 충분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외 4편, 「탄금」 외 2편이
마지막까지 심사자의 손에 남았음을 덧붙여야겠다. 두 분은 이미 충분한 관록이 느껴졌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외 4편은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에 함몰되지 않고 팽팽한 운율로 시적 순간을 발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에 일정한 틀이 생긴 건, 혹 응모작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이마
위에 견고한 벽이 생긴 걸까? 오래 망설이게 했다. 「탄금」 외 2편은 우리말의 가락과 정서를 잘 형상화한 수준 높은 시였다. 다만, 전통적인
것이 흔히 그렇듯 오래 쓴 수수 빗자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만큼 언어의 깊이에 닿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선에 들지 못한 분들도 이미 시인이다. 시를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다. 막 여행 차표를 받은 당선자는 출발지에 섰다고 여기시길 바란다. 선외 분들은 갈아타야할 승차시간이 조금 지체됐다고, 마음 토닥이시길 부탁드린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시인 이시영 이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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