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2018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박쥐 / 윤여진

희라킴 2018. 1. 2. 11:28

[2018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윤여진



박쥐


있잖아 이 붉은 지퍼를 올리면 그녀의 방이 있어 내가 구르기도 전에 발등을 내쳤던 신음, 그녀의 손가락을 잡으면 구슬을 고르듯 둥근 호흡이 미끄러져 들어왔지 켜켜이 나를 쌓던 그녀는 더는 미룰 수 없는 걸 알았는지, 나는 그녀의 배를 뚫고 나왔어 처음으로 말똥하게 울었는데 날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선명해, 입 다물었지


노을을 오래 눈에 담으면 모든 결심이 번지고 마는 거, 아니? 나는 거꾸로 앉아 바깥을 노려봤어 배꼽 언저리를 돌리면 꿈속에서 잠드는 그녀의 집이 있어, 내가 모를 남자와 나만 한 아이가 있다는 그 집, 문지방을 넘기도 전에 접질리는 호흡. 쌓아둔 라면이 떨어질 때마다 잘 살고 있었네? 그녀는 내게 돌아와 물었지 발가락 사이엔 어설프게 부러뜨린 빛이 한가득이었어


난 그녀가 쏟아낸 그림자를 받아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랐어 뒤통수에 부러진 그녀의 날개를 밀어놓고, 기껏 고른 어둠을 양발 가득 쥐고 매달렸지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말해 이젠 멀리 못 날아가겠네, 힘껏 닳은 발톱을 내밀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남은 날개를 내려다봐, 떨어진 돌조각을 씹어 삼키며 불현듯 나는 놀라곤 해 다시 멀어진 저 지퍼, 똑 닮은 저 곡선이 내 배에도 들어차 있었거든 흉터를 밝히는 건 촘촘히 밀려가는 증오, 잘 보이도록 내가 나온 자국을 저무는 해에게 붙여두지


귀소본능은 박쥐의 지긋지긋한 버릇, 몸살처럼 돌아올 그림자를 향해 긴 잠을 자둬야지 나는 늘 거꾸로 앉아 말해 어서 와 엄마



※약력 1995년 충북 음성 출생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모성의 신화에 대한 시적인 뒤집기 인상적


예심을 통해 올라온 것은 20여 명의 작품이었다. 투고작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적인 것’에 다가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가감’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시적인 것에 육박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시가 될 수 없는 것과의 긴장 속에서만 시적인 것은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사위원은 작품들을 추려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추일범, 이린아, 윤여진의 작품을 남겨두게 되었다. 이 시들은 각기 다른 측면에서의 선명한 장단점을 갖고 있었고 그 나름의 시적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추일범의 「구름의 실족사」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그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공감각이 뛰어났다. 죽은 사람과 조문객 사이를 은유의 힘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이 설득력 있는 감성을 전달했다. 다만 그 차분한 감동은 강렬한 매혹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린아의 「편집증」은 호치키스라는 오브제에 대한 시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열두 명의 이모와 방문을 잠근 다섯 명의 언니”의 예기치 않은 등장은 시적인 언어의 절묘한 돌발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시와 투고된 다른 작품들과 편차가 있는 것은 아쉬움이었다.

윤여진의 시들에서는 정교한 언어들과 강렬한 이미지들이 엮어내는 인상적인 성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투고작 가운데 「박쥐」와 「구름 수리공」 모두 수작이었다. 상대적으로 「박쥐」가 더욱 특별한 발화법과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가족과 모성을 둘러싼 이야기가 있지만 그것을 서사로 끌고 가지 않고 점묘법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부분마다 집중해서 전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자신이 생성하는 이미지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처럼 보인다. 모성을 ‘박쥐’라는 이미지로 상상적으로 재구성한 점도 매력적이지만, 집을 떠났다 돌아오는 존재가 모성이라는 설정 역시 익숙한 모성의 신화를 뒤집는다. 이 시적인 뒤집기를 통해 모성을 둘러싼 상징질서에 날카로운 균열을 낸다. 섬세한 재능에 대해 신뢰할 수 있었고, 미지의 폭발력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송재학 시인, 이광호 서울 예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