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복도 / 변선우

희라킴 2018. 1. 1. 17:59

[2018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변선우



복도



나는 기나긴 몸짓이다 흥건하게 엎질러져 있고 그렇담 액체인걸까 어딘가로 흐르고 있고 흐른다는 건 결국인 걸까 힘을 다해 펼쳐져 있다 그렇담 일기인 걸까 저 두 발은 두 눈을 써내려가는 걸까 드러낼 자신이 없고 드러낼 문장이 없다 나는 손이 있었다면 총을 쏘아보았을 것이다 꽝! 하는 소리와 살아나는 사람들, 나는 기뻐할 수 있을까 그렇담 사람인 걸까 질투는 씹어 삼키는 걸까 살아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걸까 고래가 나를 건너간다 고래의 두 발은 내 아래에서 자유롭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래의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으며 채식을 시작한 고래가 있다 저 끝에 과수원이 있다 고래는 풀밭에 매달려 나를 읽어내린다 나의 미래는 거기에 적혀있을까 나의 몸이 다시 시작되고 잘려지고 이어지는데 과일들은 입을 지우지 않는다 고래의 고향이 싱싱해지는 신호인 걸까 멀어지는 장면에서 검정이 튀어 오른다 내가 저걸 건너간다면… 복도의 이야기가 아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무수한 과일이 열리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손잡이


△1993년 대전 출생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동대학원 석사 재학



● 심사평 시 다층적 은유에 의한 소재의 확장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 보여줘 


본심에 올라온 23명의 작품들은 대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도를 보였다. ‘저격수’ 외 5편은 시적 발상에 있어 독특함과 힘을 보여줬지만 상식적 진술과 지나치게 평이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웠다. ‘저격수’ 이외 작품들이 수준의 편차를 지닌 것도 최종 결정을 유보하게 만들었다. 이는 시적 묘사의 힘을 보여주는 ‘골목의 흉터’와 같은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서 문장의 탄성이 떨어지고 이 작품 이외의 작품들에서 이를 만회할 만한 신뢰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오렌지 저장소’ 외 5편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유가 참신하고 소재를 시적으로 묘사하는 역량 역시 돋보였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더불어 검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더러 지나치게 설명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기에 조금만 덜 친절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런 점들을 세세히 검토하며 변선우 씨의 ‘복도’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우선 응모한 작품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을 주었다. ‘복도’는 소재를 다층적 은유에 의해 능란하게 확장함으로써 흥미로운 시적 사유의 전개를 보여줬다. 시가 감상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과장으로 치닫거나 지적 퍼즐로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현상이 빈번하게 목도되는 이즈음에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을 지닌 신인에게 출발의 즐거움과 불쾌하지 않은 부담감을 함께 안겨주는 것이 제법 그럴듯한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변선우 씨에게 축하의 악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혜순 시인(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조강석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