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돌의 문서 /이린아

희라킴 2018. 1. 1. 17:56

[2018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이린아



돌의 문서



잠자는 돌은 언제 증언대에 설까?


돌은 가장 오래된 증인이자 확고한 증언대야. 돌에는 무수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어. 하물며 짐승의 발자국부터 풀꽃의 여름부터 순간의 빗방울까지 보관되어 있어.


돌은 한때 단죄의 기준이었어.
비난하는 청중이었고 항거하는 행동이었어.


돌은 그래.
인간이 아직 맡지 못하는 숨이 있다면 그건 돌의 숨이야. 오래된 공중을 비상하는 기억이 있는 돌은 날아오르려 점화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어.


돌은 바람을 몸에 새기고 물의 흐름도 몸에 새기고 움푹한 곳을 만들어 구름의 척후가 되기도 해. 덜어내는 일을 일러 부스러기라고 해. 하찮고 심심한 것들에게 세상 전부의 색을 섞어 딱딱하게 말려 놓았어. 아무 무게도 나가지 않는 저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인간이 쌓은 저 딱딱한 돌의 축대들 때문일 거야.


잠자던 돌이 결심을 하면 뾰족했던 돌은 뭉툭한 증언을 쏟아낼 것이고 둥그런 돌은 굴러가는 증언을 할 거야.


단단하고 매끈한 곁을 내주고 스스로 배회하는
돌들의 꿈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이 굴러다닌 거야.
아무런 체중도 나가지 않을 때까지.



―1988년 서울 출생―명지대 뮤지컬과 졸업―동 대학원 뮤지컬과 재학



[詩 부문 심사평] 현란하지 않게… 돌에 비친 시대정신의 단면


신춘문예 투고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한국 현대시의 오늘과 내일을 파악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한다. 마치 아이돌 가수들이 현란한 춤 동작을 앞세우다 정작 노래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신춘문예 투고 시 또한 추상적이고 몽환적인 언어의 춤이 지나치게 현란해 시의 본질을 잃고 있어 안타깝다.
최종적으로 거론한 작품은 ‘그림자 꿰매기’(문수빈) ‘오늘의 기원’(김성열)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장현) ‘저녁 기도’(정동일) ‘망망’(이철우) ‘돌의 문서’(이린아) 6편이었다.
‘그림자 꿰매기’는 그림자를 통한 인간관계 실체의 탐구 정신이 엿보였으나 전반적으로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오늘의 기원’은 현실의 고통을 구체화한 점은 좋았으나 언어 사용이 구태의연하다는 점에서, ‘아비뇽의 다리 위에서’는 춤추는 남녀의 모습을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저녁 기도’는 하루의 삶을 성찰하는 태도는 진지하지만 내용에 연결성이 없고 산만하다는 점에서 제외됐다. ‘망망’은 해도(海圖)를 인생과 역사의 지도로서 인간 해방과 자유를 은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였지만 서사의 구체성 부족 등이 단점으로 지적됐다.
당선작 ‘돌의 문서’는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이 시대의 이야기로 읽힌다. 침묵을 옹호하는 시대에서 침묵의 증언을 요구하는 시대로 전환돼야 한다는 것이 시 전체를 관류하는 정신이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안정적이어서 신인답지 않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당선자가 돌에 새겨진 문서의 구체적 내용을 앞으로 두고두고 시로 쓸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정희(시인), 정호승(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