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한국경제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조윤진
새살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 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조윤진 씨는 △1995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중
심사평 / 젊음의 비애가 눈앞에 생생 소박하지만 진실해서 감동적
‘2018 한경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심사에 들어갔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실감이 사라진 아득한 세계, 점차 희미해지는 너와 나의 존재감, 그것의 기묘한 알레고리화(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 등을 공통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1차 관문을 너끈히 통과한 응모자는 박현주, 박은영, 양은경, 안정호, 전수오, 김보라, 이서연, 전명환, 서주완, 조윤진이다. 뒤의 세 명을 최종 집중토론 대상으로 삼았다. 전명환의 ‘도출한 적 없는 윤리성’은 못을 박다가 벽이 전부 무너져 버린 상황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나 제목이 생경했고, 알레고리의 타점이 불명확했다. 서주완의 ‘인간적인 새들의 즐거움’은 ‘세계는 좀먹은 탁자에 불과했지만/나는 어떤 것도 올려놓지 못했다’는 좋은 구절이 짜임새 있게 변주·확장·의미화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숙고와 토론 끝에 조윤진의 ‘새살’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못다 한 최선’이 ‘잘못’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길 없는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한 상투성을 극복해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심사자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새로운 시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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