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밟기
강표성
어스름을 배경으로 가을들녘이 수묵화를 치고 있다.
선들바람에, 늘어졌던 몸이 바람개비처럼 되살아난다. 명절 준비를 끝내고 동서들과 잠시 밖으로 나오니 김제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엊그제 모를 낸 것 같은데 들녘은 가을로 출렁인다. 여리디 여린 모가 무논으로 실려 갈 때면 저들이 언제 땅 힘을 받을까 싶었다. 하루가 다르게 튼실한 뿌리를 내린 게 대견하다. 몇 번 비바람이 몰아친 것 같은데 꿋꿋하게 서 있는 벼들이다. 억센 잡초들과 싸우고 온갖 벌레들을 물리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것들이 한 생을 잘 살아낸 사람 같아 다시 보인다.
처음으로 김제만경 들판을 밟아본 지가 언제였나. 결혼을 하자마자 김제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시댁 가풍도 익히고 시어른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라지만 막막했다. 직장생활만 했지 신부 수업은 생각도 못한 내게 방앗간집 맏며느리 역할은 버거웠다. 새벽부터 일어나 아궁이의 재를 담아내야했다. 날리는 재가 싫어 물을 잔뜩 끼얹다보니 당그래를 끌어당기느라 헛힘을 뺐다. 군불을 때고, 밥을 짓고, 물을 데우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아궁이 앞을 서성이는 시골생활이 낯설었다. 마치 외진 곳에 유폐된 기분이었다. 시집살이 몇 달이 몇 년 같았다.
들길을 걷다 보니 움푹 꺼진 곳이 있다. 한쪽으로 쓰러져 있는 벼들이다. 다른 논의 벼는 짱짱한데 바람을 견디기가 어려웠나 보다. 한쪽에서 쓰러지기 시작하니 옆자리의 벼들도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졌다. 바람이 뒹굴다 간 자리에 깊은 어둠이 서려있다. 서로의 허리를 동이고 어깨동무하고 서 있는 이웃논과는 다르다.
지난 설, 우리 집안에도 고약한 바람이 몰아쳤다. 젊은 동서가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명절인데도 안주인이 없는 시댁은 창문이 없는 집 같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동서였기에 빈자리가 더 컸다. 어린 모같은 그녀도 고향집을 지키자니 힘들었을 것이다. 말 많고 탈도 많은 시골 생활이다. 농사일도 만만찮은데다 문밖만 나서면 모두가 ‘아재’고 ‘아짐’이라서 층층시하 시집살이나 다름없다. 그런 환경에서도 참한 며느리로 인정받는 동서가 대견하기도 하고, 맏며느리인 나로서는 미안한 마음이 늘 뒤따랐다.
길가에는 노란 모자를 쓴 달맞이꽃들이 마중 나와 있다. 바람결에 깻잎 냄새도 파고든다. 톡 쏘면서 쌉싸름한 향이 고향길목임을 알려준다. 밝은 낮에는 눈에 가려 잘 모르고 지나치던 것이 어둠 속에서는 가깝게 느껴진다. 바람과 달빛이 징검다리가 되어 마음을 여나 보다.
누군가, 그 동안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한다. 사연도 제각각이다. 사업이 잘 안 풀리는 이, 몸이 아픈 이, 고삼 엄마가 된 이 등 다들 걱정 없는 집이 없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쪽은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해볼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역부족이다. 제 앞가림하기도 급급하지만 그래도 각별한 시간임을 안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어깨동무를 한 것 같다.
들판의 저 벼들도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숱하게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다독였겠다. 저들을 키운 것은 햇빛과 소낙비만은 아니다. 햇살만 가득했다면 벼가 웃자라 작은 바람에도 쉬 넘어지고, 사시사철 무논이었다면 벌레들의 천국을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어둡고 축축한 땅을 견디고, 때로는 갈라터지는 바닥을 참으며 제 시간을 채운 벼들이다. 온갖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껴안으며 익어가는 것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우리네 삶도 그러지 싶다.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제 몫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잘 통과하는 것이 인생의 노정이다. 뜨거운 햇살도, 어두운 밤도 지나가야 한다. 때로는 흔들리며 뿌리를 내린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매를 맺기 위해 물을 실어나르고 햇살을 들어앉힌다. 밤낮 구별없이 제 자리를 지켜낸다. 햇살이 성장의 시간이라면 침묵의 밤은 숙성의 시간이지 싶어 한 밤의 달빛도 정겹게 다가온다.
달빛 가득한 은회색 들판이 무언의 잠언 같다. 뿌린 대로 거두는 정직한 대지이다. 내 삶의 뜨락에 무엇을 키우고 있는지 생각해본다. 혹여 잡초 같은 것을 잔뜩 뿌려놓은 것은 아닌지, 씨앗이 자리 잡기도 전에 조바심으로 조장을 한 건 아닌지 여러 생각이 스친다.
앞서가던 둘째동서가 뒤를 돌아본다.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막내 동서가 속도를 낸다. 사는 일도 이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는 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없는 울타리가 되고 때로는 버팀목이 되어.
먼 데서 바람이 불어온다. 구수한 나락 내음이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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