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해양문학상 수필 은상]
칠면초
조미정
순천만의 한적한 갯둑을 따라 걷다가 물감을 뿌려놓은 듯 붉은 갯벌을 만났다. 낯선 식물이 군락을 이루어 갯벌을 이불처럼 덮고 있었다. 무슨 풀일까?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잎뿐만 아니라 잎겨드랑이에 맺은 열매까지 붉게 단풍이 들었다. 포자로 번식하는 해초가 아닌 어엿한 육상식물이 소금기 버석한 갯벌에서 살아가다니 꽃봉오리처럼 가슴이 오므라드는 듯했다.
일 년에 일곱 번이나 색깔이 변한다하여 ‘칠면초’라고 이름 붙여진 염생식물이었다. 뻘배를 밀며 꼬막을 캐던 아낙은 남도 사투리로 ‘기진개’라고 불렀다. 육상식물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염생식물은 많다. 바닷가 모래 위나 염전에서도 꿋꿋이 뿌리를 내려 터를 잡는다. 하지만 바다 가장 가까이에서 살고 있어 밀려들어온 바닷물에 오롯이 몸이 잠겨도 살아남는 식물은 오직 칠면초뿐이다.
칠면초의 통통한 줄기를 뚝 잘라 씹으면 짜디짠 소금 맛이 난다. 짠물을 빨아들여 몸속에 저장했나 보다. 갯벌에서도 살아갈 방도를 마련하기 위해 몸 속 염분의 농도를 바닷물과 얼추 비슷하게 만들어 스스로 내성을 키웠다. 아무리 억척스럽다 해도 바닷물에 주기적으로 몸을 담그는 삶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용케 말라죽지 않고 수북이 무리지어 살아가는 칠면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큰엄마가 겹쳐 보인다.
큰엄마는 돌덩이보다 단단한 억척이었다.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허리 한번 펼 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작은 어촌 마을의 이장이었던 큰아버지는 내 어렸을 적에 얼음판에 미끄러진 후유증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병석에서 돌아가셨다. 포기에 주렁주렁 달린 고구마처럼 자식들은 올망졸망하고, 모시고 있던 할머니는 연로하셨다. 마냥 주저앉아 슬퍼할 수만은 없었던 큰엄마는 주저 없이 거친 삶의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건장한 사내가 살아가기에도 바다의 결은 거칠다. 하물며 여인 혼자서는 오죽했을까. 가끔이라도 지평선을 드러내는 갯벌은 차라리 견디기 쉬운 바다의 마디였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조간대에 몸을 담그고 허리까지 발이 빠져도 빠득빠득 살았다. 그렇다고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 어촌에서의 삶이다. 동네사람들의 도움으로 어물전에 자리를 마련한 일이 그나마 큰엄마의 한시름을 놓게 했다.
생선 비늘처럼 투명한 땀을 흘리던 큰엄마는 갯벌에서의 삶에 완전히 적응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밀려왔다 쓸려가는 삶의 조류는 하루에 두 번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따금씩 큰 태풍이 불어와 스펀지처럼 삶의 완충작용을 하던 갯벌을 초토화시켰다. 그 해는 연이어 몰아닥친 태풍에 장성한 자식 둘을 잃었다. 큰아들이 남겨놓고 간 핏덩이들을 끌어안고 통곡하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큰엄마는 막내아들마저 병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천형 같은 삶의 질곡이었다. 달이 바닷물을 끌어당기면 한여름 꼬막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던 바지선이나 낡은 목선도 바닥에 주저앉는다. 다시 바닷물이 들어올 때까지 옴짝달싹 못한다. 그러면 큰엄마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갯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저무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해조음이 그르렁거리면 얼큰히 취기가 오른 큰아버지가 싱글거리는 낯빛으로 대문을 들어설 것 같다고도 했다. 망연자실한 모습이 너무도 외롭고 쓸쓸해보였다.
육상식물이 바닷가에 살 수 없는 것은 삼투압현상 때문이다. 자칫 짠 바닷물에 몸속의 수분이 다 빠져나가 허옇게 말라죽고 만다. 지쳤는지 큰엄마의 몸도 꼬챙이처럼 말라갔다. 하지만 담수에서는 더더욱 살 수 없는 칠면초였다. 다시 한 번 더 꺾어진 무릎에 힘을 주는 동안, 큰엄마의 몸에서는 육질의 통통한 잎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잎이 두꺼워져야 삶의 독소와 짠 소금기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봄이 지나간 어느 날, 고향에서 다시 만난 큰엄마는 밀레의 만종처럼 평화로워 보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마당에 쪼그려 앉아 바다 식물을 말리고 있는 큰엄마 곁에는 갈래머리를 한 쌍둥이 조카들이 소꿉을 놀고 있었다. 까르르거리는 조카들을 돌아보는 큰엄마의 얼굴에 바다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반짝이는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라는 단어는 조카들이었나 보다. 자식들 대신 지켜야할 손녀들이 있었기에 큰엄마는 다시 갯벌로 나가 설 수 있게 되었다.
문득 파멸당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헤밍웨이의 말이 떠오른다. 닥친 시련을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강인한 노인의 초상이 바로 큰엄마가 아닐까 싶었다. 처음에는 초록색이던 칠면초가 짠 물을 빨아들이면 들일수록 붉게 변해가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열매가 익듯 시련 속에서 더욱 완숙해지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삶이라는 갯벌은 고요하기보다 소란스럽다. 울퉁불퉁한 리아스식 해안이 바다의 힘을 빼버렸지만 그 속에서 수많은 바다생물을 키워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듯 보이는 회색 갯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크고 작은 생물들이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와글와글 살아가고 있다. 바닥을 온몸으로 밀고 기어간 갯지렁이도 있고 제 몸보다 큰 집게발을 들었다놨다하는 농게도 있다. 흙 딱지를 등에 이고 조그만 소리에도 놀라는 칠게들도 바글바글하다. 삶의 방식은 달라도 칠면초도 그들처럼 짠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살아가는 바다생물이었으리라.
칠면초 무성한 갯벌에 서 있으면 어디선가 생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찻물이 끓듯 뽀글거린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느라 갯벌이 지르는 아우성이다. 붉은 카펫 같은 칠면초는 또다시 짠 내 가득한 바닷물에 몸을 담근다. 묵묵히 생의 시련을 견뎌낸다. 바닷물에 일렁이는 칠면초가 갯벌의 꽃으로 보였다. 소금기를 견디며 살아가는 인고의 꽃! 그 위로 칼칼한 바다노을이 내려앉는다. 노을보다 더 붉은 칠면초가 아름답다. 큰엄마가 눈물겹다.
'문예당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리목월 2017년 수필 신인상 당선작] 시접 한 쪽/ 정은아 (0) | 2017.10.12 |
---|---|
[제11회 해양문학상 수필 금상] 숨비소리 / 김정은 (0) | 2017.09.22 |
[제8회 천강문학상 수필 대상] 각도를 풀다 / 이혜경 (0) | 2017.09.13 |
[제8회 천강문학상 수필 우수상] 공터 / 김응숙 (0) | 2017.09.13 |
[제12회 복숭아문학상 수필 최우수] 엄마를 닮은 복숭아 / 최부련 (0) | 2017.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