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천국
박소란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 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심장에 가까운 말』, 박소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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