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난 감자
심선경
어두운 창고에 둔 나무상자에서 감자를 꺼낸다. 불을 켜지 않아도 나무상자가 어디쯤 있다는 걸 알기에 어림짐작으로 손을 더듬어 감자 몇 알을 쥔다. 하지만 곧바로 손에 잡힌 것을 놓고 만다. 내가 기억하던 그 감각이 아니다. 감자 한 상자를 사서 창고에 넣어둔 게 언제였나. 한없이 못생기고 어수룩하게만 보였던 감자의 몸 곳곳에는 성난 뿔이 불쑥불쑥 돋아있다.
생각해보니 감자를 통째로 들여놓고 창고 문을 연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처음 얼마간은 씨알이 굵은 감자를 여남은 개 가량 골라내어 솥에 쪄 먹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창고에 감자를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 이제야 그 생각을 한 것이다.
기도문처럼 긴 신음소리를 내며 제 몸에 푸른 독을 품어온 감자가 마침내 스스로 얽은 눈을 틔워 초록색 싹을 낼 때까지 나는 여전히 감자의 뭉툭한 몸과 하얀 속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이 켜켜이 쌓인 창고에 갇힌 감자는 몇 번쯤은 목청 높여 비명을 질러도 보았을 것이다. 무심하게 흘러버린 그 숱한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 쓴 채 웅크리고 앉은 감자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으리라 기다림의 마음도 너무 오래되면 맥이 풀리고 결국 시름시름 앓게 되지 않던가.
지난 겨울은 너무도 춥고 길어 더디 오는 봄을 원망하였다. 이 차갑고 답답한 공간 속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다고, 이제 그만 나를 놓아달라고 감자들처럼 소리를 지를 수조차 없었던 나는 그저 구석에 웅크려 앉아 언젠가는 오고야 말 따뜻한 봄을 마냥 기다릴 수밖에. 그나마 기다림이 있어 앓기도 했었고 아프다는 사실만으로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썩어가는 감자의 몸에서 새로 싹이 돋아나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삶은 내게 얼마나 부조리하고 난해한 공식을 던져주었던가. 인생은 단 한번도 나를 속이지 않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인생을 믿지 않게 되었다. 창고 속 감자처럼 너무도 막막한 어둠에 갇혀 날 수 없는 날개를 겨드랑이에 품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 수없이 물음표를 던져보기도 했었다. 어쩌면 창고 속 감자는 똬리를 틀고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갈색 뱀처럼 어둠의 발등을 힘겹게 넘으며 또다른 수태를 꿈꾸었는지 모른다. 안으로 삭이지 못해 번뜩였을 저 서슬 푸른 독기는 급기야 감자의 온몸을 녹슬게 하였으리라.
새가 알을 품듯이 감자도 제 스스로를 다독이고 품으며 그 긴 시간을 견뎌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의 눈물 끝에 짓무른 눈언저리가 보라색 멍이 들고 마침내 성난 뿔이 돋아날 즈음 그 몸인들 온전하였을까. 가장 얽은 눈에서부터 싹이 자라난 감자는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가려는 희망의 어깨살처럼 속으로 품어온 독과 상한 마음을 이렇듯 단호하게 바깥으로 드러내 놓은 것이다.
저렇게 순하고 어질게만 보였던 감자에게도 이처럼 독한 구석이 있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독이 때로는 약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나 다른 동물들에게는 독이 해롭지만 감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몸속의 독성은 종자를 번식시키기 위한 유일한 보호책이 되었으리라. 만약 감자가 창고 속에 갇히지 않고 겨울벌판에 묻혀 있었다면 아마도 야생 조류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싹을 제때 틔우지 못한 녀석은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고 눈치껏 빨리 틔운 녀석은 갓 자란 싹의 독성으로 생태계의 먹잇감이 되는 화를 면하게 되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감자 한 알도 다음 세대를 잇기 위해 저토록 아픈 부활을 꿈꾸건만 나는 왜 아직도 몸을 사리고만 있는 것인가. 감자의 몸에도 뼈가 있다면 그건 아마 투명한 슬픔일 것이다. 서서히 죽어가는 몸과 동시에 자라나는 열망 사이의 여백이 겨울바람처럼 마음을 아리게 하였을 게다. 저렇듯 투명한 슬픔조차도 엑스레이는 선명하게 촬영해 낼 수 있을까. 나무 상자 속에는 다른 감자에 짓눌리거나 창고의 습기로 인해 벌써 반쯤이나 썩어버린 불운한 감자도 있다. 빨리 골라내지 않으면 멀쩡한 감자까지 죄다 못쓰게 될 성싶다.
바구니 두 개를 놓고 감자 살생부를 만든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염라대왕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여 먹을 감자와 버릴 감자를 골라낸다. 아직 싹을 틔우지 않아 표면이 매끈하고 둥글둥글한 감자는 가까운 바구니에 살짝 놓고 뿔이 나서 못생긴 감자와 썩은 감자는 멀리 있는 감자바구니에 마구 던져 놓는다. 가까운 벗이 보았다면, 허물덩어리인 제 모습은 볼 줄 모르고 못난 감자는 잘도 골라낸다며 은근슬쩍 나를 비웃지 않았을까.
언젠가 소설가 이문열 선생의 글 속에서 발견한 구절처럼 나는 지금 내 자서전의 가장 힘든 부분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저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이 가고, 마흔이 오더니 이제 머지않아 쉰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뿔이 나온 못생긴 감자를 골라 멀리 던져버린 내가 만약 감자로 태어났다면 지금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제대로 뜻 한번 펴지도 못한 채 오늘이 가면 매번 어김없이 내일이 당도해 있을 것을 철저히 믿는 나는, 결국 푸른 독도 품지 못하고 성난 뿔 하나도 내어놓지 못해 썩어버리고 마는 불량감자가 되지 않을까 설핏 두려워지는 저녁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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