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겨울 산을 오르며 / 변해명

희라킴 2017. 1. 27. 21:51





겨울 산을 오르며 



                                                                                                 변해명

 

겨울 산에 들어서면 숲길을 덮고 있는 낙엽과 만나게 된다. 습기가 가득한 산길, 어둠이 안개처럼 휘돌아드는 산길엔 낙엽 향기가 피어오른다. 참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황금빛 낙엽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낙엽에 발목을 묻고 오르노라면 발에 밟히는 낙엽이 향기를 뿜어낸다. 꽃향기보다 기품 있고 은근한 향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 잡힐 듯 말 듯한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낙엽은 일년내 참나무들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너울이기에 남루하거나 추하지 않다. 옷 벗은 나무들은 잎이 무성했을 때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결한 모습이다. 가지들을 들어 하늘을 향해 모으고 고해성사를 바치는 모습 같아 숙연하기까지 하다.


나는 겨울 산을 오르면 살아온 세월이 모두 녹아 든 정선아리랑 가락 같은 미련과 정한과 애절함 같은 숨결이 서려 있는 것 같아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래서인가 낙엽을 밟을 때면 까맣게 잊고 살아온 자신과 비로소 만나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도 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들이 얼마나 많은 낙엽으로 떨어져 쌓여 내 아픈 기억들을 묻어버렸을까? 고통스럽던 나날들도 향기롭게 되살리우고 오직 아름답기만 한 추억으로 그리워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은 멀리 떠나 그리움만으로 생각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을 결코 잊지 못하고 있음도 어제는 고통이더니 지금은 내 마음을 채워주는 풍요로움으로 기다림을 주고 있음도.


산등성이 양지 바른 무덤가에서 잠시 쉬어본다. 밝고 투명한 햇빛 속에 잠들어 있는 영혼이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낙엽이 그 위에도 떨어져 쌓여 있다.


나는 어느 무덤이고 무덤 곁에 머무르면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내가 무덤가에 앉아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된 것은 외할머니 무덤가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외할머니의 무덤은 무덤이 아니고 주무시는 공간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외갓집 뒷동산에 있는 외할머니 무덤가에서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놀았다. 해소 기침으로 앉아서 밤잠을 설치시면서도 화로 속에 군밤만은 묻었다 잊지 않고 꺼내 주시던 외할머니, 봄이면 버들피리를 어찌나 구성지게 부시는지 동네 아낙들이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곤 했었다. 내가 커서 의사가 되어 할머니의 병을 꼭 고쳐드린다고 했었는데…….


그 시절에 정정하셨던 외할아버지도 장정이던 외삼촌도 외숙모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무덤처럼 외가의 뒷동산에 나란히 모두 누워 잠들어 계시다.


새봄에는 새잎이 나고 나무들은 청청한 옷을 입고 또 한여름을 자랑하지만, 곧 겨울이 오고 어느 가지에서고 잎을 지우고 그 잎으로 길을 덮는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리라.

 

“제가 일주일간 밤에 누워서 잠을 자지 못했어요. 동네 병원에 가니 큰 병원에 가라고 하기에 오늘 큰 병원에 갔더니 폐가 제 기능을 다해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하는군요. 혼자서 50년을 애썼으니 지칠 만도 하겠지요.”


그는 폐가 하나인 사람으로 어릴 적에 폐렴으로 폐 하나를 잃고 남은 폐 하나로 살아온 사람인데, 지금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하고 입원중이라고 하는데……. 낙엽은 아무 저항없이 내 발 밑에서 밟힌다.


교내 체육대회를 마치고 다리가 많이 아프다며 병원에 가니 근육통이라고 했는데, 그 길로 근육암으로 다리를 자르고 일년을 더 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여교사. 그의 나이 25세였다. 오늘따라 그녀의 모습이 다가서는 것은 또 한 직원의 고통을 내 능력으로서는 위로할 수조차 없음이 지난날의 그녀를 위로하지 못했던 고통으로 겹쳐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나이에 낙엽처럼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 사람들. 그들도 이 투명한 햇빛 속에 잠들어 있으리라.


살아오면서 버리지 못했던 탐욕이며 시기, 질투며 분노며 미움과 원한 등 그 많은 추한 모습들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서 있는 사람들. 비록 얼굴에 주름이 늘고 머리는 백발이 되어 가지만, 자신의 성찰로 다듬어지는 삶과 그 삶의 빛으로 아름다움을 보듬어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겨울 산의 나무들처럼 만나 보고 싶다.


내 오늘을 정결하게 삶으로 내일에 욕심을 지니지 않게 하시고, 내 옷은 비록 때묻고 남루하고 추하고 쓸모없지만, 낙엽처럼 향기롭게 하소서. 해가 석양에 기울기까지 푸르름을 향유하게 하시고 섭리대로 흙으로 돌아감을 감사하게 하소서.


오늘 유난히 햇살이 눈부신 날 겨울 산을 오르며 기도를 바친다. 낙엽이 빈 겨울 산을 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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