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나를 소지한 것들/ 최장순

희라킴 2017. 1. 26. 19:57




나를 소지한 것들

                      

                                                                                                                                        최장순

                                                                                               

  나를 에워싸고 있는 소지품들. 그들이 없으면 무언가 허전하고 몇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만큼 불안하다. 몸에 걸치거나 손에 드는 생명 없는 것들은 나를 대변하고 내 호흡을 따라 이동하고 움직인다. 그것들은 단순한 소지품이 아니다. 그들 없이 나의 하루는 완성되지 않는다.

 

안경

  덧씌웠던 시력을 머리맡에 벗어놓는다. 잠자리에 누운 미간 아래가 허전하다. 마치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견고한 착각.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콧잔등을 만져본다.

  종일 내 눈을 따라다니던 그것, 밤이 되어야만 온전히 내 모습을 볼 것이라는 생각에 머리맡이 신경 쓰인다. 종일 풍경을 전송하고 나의 눈치를 살폈을 안경.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끌어다주고, 가까운 것을 확대시키고, 흐릿한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눈동자가 확대 되거나 축소될 때마다 놀라거나 겁을 먹었을 그것은 긴장과 이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대충 넘겨도 괜찮을 것들을 상세히 전달함으로써, 나는 또 얼마나 쓸데없이 참견을 하고 걱정을 만들어 냈는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편견을 덧입혀 내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는가.

  둘러보니, 선명하던 시계視界가 흐릿하다. 문득, 내가 세상을 읽은 것이 아니라 안경이 세상을 읽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동그랗거나 사각의 틀에 갇혀 나는 세상을 오독했다는 것일까. 뿔테에 갇힌 두개의 렌즈가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고, 나는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생각해 본다. 안경이 사물을 왜곡하게 했을까? 본질을 왜곡한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게 사물을 직시하라고, 안경은 내 흐릿한 시력에 선명함을 덧입혀 준 것이었다. 네모 아니면 동그라미, 나의 고집스런 틀을 걱정하며 더 정확하게 보라는 사명감을 덧씌워준 것이었다. 시력검사를 받고 안경을 교체하듯, 편견의 안경, 선입관의 안경, 세계관의 안경을 교정해야할지도 모른다.

 

스마트 폰

  이브의 사과가 이토록 유혹적이었을까. 한입 베어 문 스티브잡스의 사과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반짝, 화면이 켜지는 순간부터 정신을 앗아가는 사이버의 세계. 그 안에는 수많은 이름과 기이한 사건과 과거와 현재가 응집되어있다.

  알라딘의 마술램프가 이럴까. 네모난 액정을 톡톡 건드리면 지니처럼 앱이 펑, 하고 나타나 세상의 온갖 정보와 재미를 갖다 바친다. 공중파를 요리하는 사이버공간에서 새로운 삶을 주도하는 디지털 노마드들. 스마트 폰은 단순한 전화기를 넘어선지 오래다.

  스마트폰이 손을 떠나면 불안하고 초조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걸으면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눈길을 멈추지 않는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도 하루 수십 번 습관적으로 열어 본다. 주머니 속보다는 손에 쥐어야 마음이 편한 시계이자 오락기이자 우편함이자 명함모음집이다.

  모처럼 아이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하고 싶은 엄마. 거리의 풍경에 반응을 떠보지만 메아리가 없더라고 했다. 아이는 이어폰을 낀 채 음악에 몰입해 있었다. 문득 엄마의 시선을 느낀 아이가 얼른 이어폰을 뺐고 궁금한 눈빛을 보냈다. 엄마는 할 말을 잃었다. 같은 길을 걷지만 서로 다른 세상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더라고 했다.

  길에서 길을 잃고, 밥에서 밥을 잃고, 말에서 말을 잃고, 멀리 떨어진 누군가에 빠져 바로 옆의 사람과 소통을 잃어버렸다. 과열된 입이 불을 지르고 지나친 상상력이 누군가의 엉덩이에 뿔을 달고, 이마에 혹을 심는다. 제 집을 뛰쳐나온 유언비어가 새로운 괴물을 확대재생산하기도 한다. 쉼 없이 글을 쓰고, 저장하고, 복사하고, 송출시키면서도 책임감이 없는 익명의 세상이다.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 물으라고 유혹하는 손안의 마술램프. 기억력을 감퇴시킬 수밖에 없다. 편함에 길든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되어간다. 얼굴도 모른 채 표정을 마주하지 않는 관계를 나는 소통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그것이 없다면 나는 뇌를 잃은 듯 깜깜할 것이다.

 

가방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가방이 어느 재질인가, 어떤 모양인가로 외출이 구별된다. 그 기분은 밖에서 만들어져 안으로 들어오고, 기분에 따라 나의 하루가 좌우된다.

  가방은 품격이다. 상표와 가격에 따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거나 빠진다. 그래서 여자들이 명품에 목을 매는 것일까. 그렇지만 명품가방이라고 해서 반드시 경제적 수준이나 품격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옷차림과 용도에 얼마만큼 어울리느냐는 것. 고가의 가방을 좋아하는 것은, 패션의 완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남자들이야 그런 점에서 조금 자유롭지만, 여자들에게는 액세서리 역할도 하기에 가품이어도 명품마크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방은 비밀스런 공간,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가 들어 있다. 공권력이 열라고 하지 않는 한, 주인의 허락 없이는 열어볼 수 없다. 그곳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들여다보는 것, 가방을 분실해 누군가 들여다보거나, 내용물을 몽땅 쏟아버렸다면 제 치부를 드러낸 가방은 한쪽에 쭈그러져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마치 비밀이 죄다 털린 듯. 남이 볼 수 없는 공간을 청결히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정결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방은 유행에 민감하다. 재질에서부터 모양, 끈, 장식품까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릴 적 멨던 란도셀 가방이 지금 젊은이들의 메는 가방이 된 듯하다. 집배원의 가방처럼 커다란 가방이 유행한 적도 있다. 손에 드는 것에서부터 메는 것까지, 옷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이 가방이다. 손잡이와 끈에 따라 패션이 달라지고, 직업이 드러나기도 한다. ‘가방끈이 길거나 짧다’라는 우스갯소리도 그와 연관이 있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책과 퇴고하지 못한 글, 생수와 보온병, 그리고 여러 약들로 가득 차있는 내 가방. 그 속을 누군가 들여다본다면 내 뱃속까지 내 보이는 느낌일 것이다. 이젠 가방 없이는 바깥출입이 불편해졌다. 사회적 불안이 가중되고 있는 요즘, 전투에 나가는 군대의 군장처럼 가방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소지한 것들. 생각해보면, 내가 그들에게 소지당한 것이 아닐까. 안경이 나를 쓰고, 스마트폰이 내 관심을 빌려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가방이 비밀스런 내 속을 수시로 열어 본다. 혹 사물에게도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에세이피아 2016 여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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