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추억
강호형
사람이 나이가 들면 추억에 산다는 말이 있다. 흔히 추억은 아름답다고들 하지만 반드시 아름다운 일만 추억으로 남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매맞는 장면을 목격한 나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없는 소이이다.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퇴비 더미를 손질하고 있었다. 퇴비장 한가운데 썩지도 않은 보리짚을 쌓고 그 가장자리를 진짜 퇴비로 위장하는 일이었다.
완성된 퇴비 더미는 높이만도 어른의 키를 훨씬 웃도는데다가 두부모처럼 반듯한 육면체의 가로 세로 족히 두어 발씩이나 되는 우람한 것이었다. 농지 면적 비례로 책임량이 할당되기 마련이었는데 우리 집은 농토가 꽤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퇴비 할당량도 그만큼 많은 것이었다. 일제의 정책이란 것이 매사 그런 식이어서 식구가 많은 집에서는 밤새워 가마니를 짜 바쳐야 했으며 누에치기, 피마자 심기 등도 마찬가지였다.
퇴비 더미를 완성한 아버지는 긴 작대기로 그 체적을 꼼꼼히 재어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머지않아 들이닥칠 일본인 검사원들의 눈을 속일 만하다고 판단한 눈치였다. 퇴비가 농사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해서 일본인의 눈을 속일 수밖에 없었던 전말은 이렇다.
2차대전의 당사국인 일본은 겉으로는 어느 나라를 점령했느니, 어느 섬을 함락했느니 하며 호기를 부렸지만 실은 극심한 물자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놋그릇을 거두어다가 탄피를 만드는가 하면, 관솔, 산초, 피마자 등으로 기름을 짜서 비행기를 띄운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순사들이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벌여 놋쇠로 된 물건이면 무엇이든 빼앗아갔으며 학교에 다니는 형, 누나들이 배당받은 산초, 관솔 피마자 등의 책임량을 채우려 산으로 들로 헤매는 것을 내 눈으로도 보았다. 언필칭 대일본제국이라지만 형편이 이 지경이고 보니 식량인들 넉넉할 까닭이 없었다. 그러니 농민들은 애써 농사를 지어봤자 놈들에게 다 빼앗기고 대신 배급받은, 썩은 콩깻묵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 수탈하는 쪽에서는 더 빼앗아가기 위해 농사를 독려하지만 빼앗기는 쪽에서는 무슨 재미로 농사에 힘쓸 것인가. 퇴비하기를 기피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은 동구 초입에 있었기 때문에 제일 먼저 검사를 받게 되었다. 당꼬바지를 입은 면서기 한 사람과 풀기가 빳빳한 제복에 허리에 ‘닛뽄도’까지 찬 순사가 검사관이었다. 들고 온 장부에서 책임량을 확인한 서기가 퇴비 더미를 재고 있었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내 심장은 새가슴처럼 할딱거렸다. 계측을 하고 있는 면서기도 그러려니와 서슬이 시퍼런 순사의 위세가 오금이 저리도록 무서웠다. 경황 중에도 힐끗 쳐다보니 아버지 역시 초조하고 불안한 눈치였다.
이윽고 면서기가 막대자를 세워 짚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내가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은 거의 동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순사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하는가 싶더니 서기에게 속삭이듯 뭐라고 지껄이는 게 아닌가! 순간 아버지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기는 아버지에게 사다리와 쇠스랑을 가져오라고 일렀다. 나는 그날 썩은 퇴비보다 생생한 보릿짚이 더 추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순사의 손바닥이 아버지의 뺨에 올라붙어 작열한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아픈 기억을 길게 말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일본 순사는 발길질도 잘 하더라고만 적어 두자.
다음 해 봄에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담임은 한국인 여선생님이었는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이미 국어 말살정책이 극에 달해 상급생들은 조선어를 쓰다가 발각되면 벌을 받아야 할 때였던 만큼 이름도 일본어로 써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육촌 형들의 어깨너머로 약간의 일본어를 익혀 두었던 터라 어쩌면 쓸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이다가 교실 안을 둘러보니 손을 든 아이는 ‘구니모토’ 하나뿐이었다. 그는 우리 반뿐만 아니라 전교에서도 유일한 일본 아이로서 교장의 아들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죠센징’중에 자기 이름을 쓸 줄 아는 아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순간, 나라도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판정패였다. 그 녀석은 하나도 틀리지 않은 반면, 나는 두 군데나 정정을 받았다. ‘オオヤマコオケイ’라고 써야할 것을 ‘オヤマコケイ’라고 썼던 것이다. 틀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잘했다고 선생님이 머리까지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시는 바람에 다소 위안이 되기는 했으나 녀석에게 진 것은 여전히 분하기만 했다. 훨씬 자란 후에야 생각해낸 것이지만, 장작 부끄러워해야할 일은 이름을 잘못 쓴 것이 아니라 ‘강’이란 어엿한 성을 두고도 ‘오오야마(大山)’란 얼토당토 않은 성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광복을 맞은 것은 바로 그해 팔월이었다. 당시에는 라디오라는 것을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만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실제보다 여러 시간이 지난 뒤였다. 일본 천황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는 것이었다.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앞다투어 공회당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어디서 났는지 태극기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선뜻 대중 앞으로 나서며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자 앞산이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이 터졌다.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조선 독립 만세!”
그것은 함성이라기보다 차라리 울부짖음이었다. 실제로 눈물을 철철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자유’라는 말을 처음 귀에 익힌 것은 그 무렵이 아닌가 한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자유라는 것이었다. 나무를 베는 것도 자유, 밀주를 담그는 것도 자유, 소를 잡아먹는 것도 자유, 심지어는 남의 따귀를 때리는 것까지도 자유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과연 자유가 좋기는 좋았다. 어른들은 사흘들이로 소를 잡았다. 농악을 울리고 덩실덩실 춤도 추었다. 사람마다 흥타령이요 날마다 잔치판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농사 지을 소가 없어 사람이 쟁기를 끄는 진풍경이 벌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쓴웃음이 난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집권 자유당이 ‘권불십년’이란 교훈을 남기고 사라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귀에 쟁쟁한 그 함성이 터진 지 올해로 벌써 50주년이란다. 그러나 50이란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광복’은 우리 민족이 영원히 교훈으로 삼아야할 추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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