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동서문학상 수필 은상]
글자를 품은 나무
이정화
‘또르륵 딱, 또르륵 딱’ 목탁소리가 정적을 깨운다. 그 울림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라는 물고기의 부릅뜬 눈이 되어 나를 붙잡는다. 지금 여기, 동서고금을 오가는 망상에 이끌려 다녀도 오로지 알아차린다. 다만, 그뿐이다. 천 년 전, 그날의 목공들도 그러했으리라.
나무는 수직의 본성을 거슬러 수평으로 자리에 누웠다. 몸을 맡긴 곳은 바다다. 낮은 곳으로 흘러 와 평평한 진리를 만드는 바다. 산벚나무는 바닷물에 이 년, 바람결에 일 년을 보낸다. 온전히 제 몸을 짠물에 맡겨 남은 우외 것을 짜낸다. 부는 바람에도 마지막 남은 진액조차 날려 보내고 나서야 몸을 바꾼다.
그 인고의 세월 동안 목판에 조각칼을 대면 도르르 말려 튀어나가는 나무 밥이 산을 이루었다. 조각칼 거머쥔 손에는 인고의 자국이 깊어지고,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질 때마다 목공들 마음속의 백팔번뇌도 고요해져 갔을 것이다. ‘해인’ 바다의 풍랑이 잠들고 삼라만상의 윤회가 새 인연의 도장을 찍는다. 고려인들은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피로 맞서지 않았다. 누이와 오라비가 쓰러져가도 끝내 창칼을 들지 않았다. 대장경은 거란과 몽고의 침입에 부처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물리치려고 만들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충돌은 죽음을 낳게 마련이다. 평화는 늘 갈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일까?
알함브라 궁전의 마지막 왕 보압딜. ‘레콘키스타(스페인 재탈환)’ 당시에 이사벨 여왕에게 전쟁 없이 알함브라를 내어준 군주이다. 아름다운 알함브라를 내어주고 모로코로 망명을 떠나는 그의 등 자락을 안달루시아의 붉은 흙과 노을이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 흘렸다. 승리의 환희보다 피 흘리지 않고 내어주는 패배가 헤네랄리페 정원보다 아름답다. 그러나 내어주지 않고 지킨 고려인들의 정신자세는 승리보다도, 포기보다도 더 숭고해 보인다. 고려의 선한 백성들의 등짐에 얹힌 나무는 평화를 만들려고 한 줄로 흙길을 잇고 나아갔다. 백성들의 마음도 하나로 모아졌다. 이러한 고려인을 어찌 숭배하지 않을 수 있으랴.
새벽예불 시간, 가사장삼 휘날리며 법고를 치는 젊은 승려는 마음의 길을 따라 두 팔로 ‘두둥둥’ 북소리를 연다. 대웅전을 가득 메운 스님들의 독경 소리, ‘시방삼세 제망찰해~’ 예불하는 소리가 새벽 산을 넘는다. 하늘이 내린 본능을 불성으로 녹여내려는 젊은 스님들의 힘찬 소리가 시린 마룻바닥을 덥힌다. 새벽어둠 따라 소리는 골짜기로 퍼져 밤길 도와 산길을 헤매는 산짐승의 야성을 잠재울까? 보랏빛 여명을 머리에 이고 고려 아낙의 치맛자락 설핏 들어 명상의 길 사뿐사뿐 내딛는 듯, 두 손 합장하고 천천히 걷는다. 내 발걸음 속 상처 입은 미물들의 아우성조차 덮어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침잠한다.
고통도 즐거움도 하나인 줄 알아 어디에도 끄달림이 없었다. 부처의 공덕을 게송하면서 해인도를 따라 걸으면 미로를 쉰 네 번 꺾어 돌아 깨달음에 이른다. 아뿔싸! 그곳은 처음 출발한 그 자리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극락이요 불국토이다. 진리는 늘 지름길에 있지 않았다.
경내를 돌아 아츰한 밝기의 고아한 석등을 지난다. 강원의 파르라니 깎은 젊은 스님들의 묵직한 묵언수행은 울력으로 나풀거리는 듯 가볍다. 가없는 부러움과 애잔함이 잠시 스쳐 다시 내 안을 살핀다.
발원에서 회향까지 십 수 년, 끝이 보이지 않는 세월이다. 누가 그 끝을 알려고 했다면 한 걸음조차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목공의 나무 미는 백지장 소리가 함박눈 켜켜이 쌓이듯 사각거린다. 그 소리가 상금도 들리는 듯하다.
모든 것이 공한 줄 알아 실체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칼과 창을 들고 싸우는 대신 마음의 염원을 담은 대장경의 금빛 활자가 춤을 춘다. 긴 세월을 지나보내고도 현재의 눈을 그대로 담은 과거라니……. 천년이 무색하다. 예술의 경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아 보인다는 것에 소름이 돋게 한다.
가야 할 먼 길, 그 길이 있었으니 세월처럼 굽이쳐 흐르는 홍류동을 따라 대장경의 대장정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가야산 해인사 깊은 산속에 보름달이 차갑게 떠 있다. 달의 인력은 바닷물을 당긴다. 불이문을 지나면 검푸르게 부풀어 오른 해인(海印)의 바다가 있다.
대장경이 몸을 맡긴 천혜의 공간, 장경각에 핀 연꽃 문을 넘는다. 직선과 곡선이 아우러진 문틀에 대웅전 기와 처마가 그림자를 펼치면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난다. 빛과 바람의 집은 오랜 세월 켜켜이 줄을 맞춰 꽂힌 대장경을 그러안고 있다. 고목 빛깔의 목판은 가로로 선(線)을 이루고, 세로의 빛은 창살을 넘어 들어와 목판과 합치된다. 천 년의 바람과 햇빛은 경판의 습기를 말리고 온도에 널뛰지 않도록 제 할 일을 해왔다.
마침내 평화의 산물 대장경을 만난다. 보드라운 풀이 짓이겨져서 풀물이 뚝뚝 떨어져도 질긴 생명력을 놓지 않아서 만난 것이다. 수없이 외세의 침입을 당해도 끈질기게 살아 온 민족이다. 산다는 것, 그 절대적 진리 앞에 대장경은 평화의 방편이 되었다.
싸우지 않고 얻어낸 평화가 참으로 가치롭다. 창칼은 녹아서 보습으로 가고, 그 날의 겪은 일을 기록으로 새기는 민족, 이야기의 심성을 가진 세월, 고려인의 평화로운 이데아는 죽어도 살아있다.
어제의 장경판과 오늘의 고고한 소나무가 산객을 맞이하는 오랜 마음의 성지에 한 줄기 바람이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간다. 돌아 나올 때 풍경소리 울리면 뭇 중생들의 마음속에도 평화의 종소리가 댕댕 들려올 것만 같다.
팔만대장경, 경 율 논을 품은 나무가 금빛의 활자로 빛난다. 그 말씀 따라 오늘의 중생들은 비워내고 있구나!
죽비 소리, 깨어나는 순간의 소리, 생각의 끝을 잡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그 소리에 나는 다시 지금을 연다.
'문예당선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노루발 / 김지희 (0) | 2017.01.01 |
---|---|
[2016년 인천시민문예대전 수필 수상작] 기다리는 나무 / 조현숙 (0) | 2016.12.30 |
[2016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수필 당선작] 먹감나무 / 신정애 (0) | 2016.12.20 |
[2016년 신라문학상 수필 대상] 풀매 / 신정애 (0) | 2016.12.19 |
[2016 제13회 동서문학상 수필 금상] 단아한 슬픔 / 김진순 (0) | 2016.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