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2016 미래에셋 문학상 수필 은상] 별을 세다 / 김아인

희라킴 2016. 10. 4. 15:47


[2016 미래에셋 문학상 수필 은상]



 별을 세다


                                                                                                                                                김아인


  무거운 소식일수록 빠르게 날아온다. 어제 저녁설거지를 하다가 사촌동서의 별세를 받았다. 지난 삼복더위에 문병을 다녀왔으니 그리 황망한 일은 아니다. 나는 별세란 말을 들으면 별을 세라는 것으로 알아듣는다. 명백한 내 잘못이지만 내 잘못이 아닌 것이 엄마가 죽은 밤에 막내고모가 나를 업고 자꾸 별을 세라 했다. 자다 깬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우물우물 별을 셌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말랑해지도록 열심히 셌다. 하지만 내 불안은 처마 끝 고드름으로 자라고 너덜거리는 문풍지 위로 울음이 번식을 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놓친 엄마의 숨결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안다는 듯이 번식된 울음은 소리로 완성되고 있었다. 소리는 차츰 제 몸피를 키워 갈라진 시간의 침묵을 메웠다. 귀를 막고 별을 세도 온통 통곡뿐이던 섣달 스무닷새의 그 밤은 울음이 얼음을 녹일 것 같았다. 암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문지방을 타넘으며 울음의 양을 보탰다. 그래도 나는 고모 등에 모로 엎드려 조용히 별만 셌다. 달빛조차 엄마 입술처럼 푸르죽죽한 밤이었다.


  조퇴하고 온 남편과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저녁어스름 속에서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낯선 사내들이 병원 마당을 서성거렸다. 이별잔치에 초대된 이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웃음기가 제거되어 있었고 반딧불이 같은 담뱃불만 깜빡거리다가 천천히 흩어져가곤 했다. 누군가의 안내로 故박영덕, 상주 이주명이라고 적힌 방을 찾았다. 형광등 불빛이 환한 복도의 맨 끝 방이다. 망자는 49세, 상주는 8세다. 위로 스무 살이 넘은 누나들도 있지만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 맏상제다. 망자의 남편 이름은 맨 아래 칸에 민들레꽃처럼 납작 엎드려있다. 방으로 들어갔다. 덥석, 누가 내 손을 잡아끈다. 망자의 시어머니시다. 퀭한 노모의 갈퀴손이 바르르 떨린다. 갑자기 혀가 굳어버린 듯 말을 찾지 못한 내 입술이 덩달아 떨린다. 그이가 비장한 얼굴로 부조함에다 봉투를 넣는다. 젊디젊은 영정을 멀뚱히 바라보더니 정중하게 절을 올린다. 돌아서서 어린 상주와 맞절을 한다. 어설픈 절을 마친 상주는 이 상황을 이해하는지 못하는지 국화 꽃빛같이 환한 얼굴로 좁은 방을 미끄러져 다닌다. 명랑해서 짠한 풍경에 박제된 내 슬픔이 투영된다. 


  한 생을 비설거지 하듯이 서둘러 끝내고 떠난 엄마의 모습이 영정사진과 겹친다. 눈물 흘릴 철조차 없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가자니 도저히 눈이 감기지 않았던 것일까? 할머니가 반쯤 뜬 엄마 눈을 쓸어내리며 ‘눈감고 가, 눈감고 가’ 라고 하셨다. 그 말이 내 귀엔 꼭 ‘눈감고 자, 눈감고 자’처럼 들렸다. 여러 날을 아랫목만 지키던 엄마는 북쪽으로 자리가 옮겨졌고 그 앞으로 접이식 기다란 가리개가 바리케이드처럼 놓였다. 읽을 수 없는 빼곡한 글자들이 그림처럼 새겨진 병풍 하나가 이승과 저승을 구분 짓듯이 버티고 있었다. 한 상 떡 벌어지게 받은 엄마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상복으로 갈아입은 내가 아버지 옆에 서서 절을 하는데 병풍 뒤로 가지런한 엄마의 버선발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놀라서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려버렸다.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갑자기 끼쳐온 무섬증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와중에도 모든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내 바람은 끝내 꿈이 되지 못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보이는 하얀 버선발이 섬뜩해서 장례가 끝나고도 안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정을 떼느라 그렇다던 할머니 말씀만 오래도록 귓전을 맴돌았다.


  풋사과 같은 상주의 설익은 슬픔을 보니 꼭 그때의 나를 보는 듯하다. 준비 안 된 이별의 대가는 먼 미래에 그리움이란 몫으로 치를 게다. 미래가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을 저 아이는 아직 모른다. 차라리 그래서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하지만 젊은 망혼의 극락왕생을 위해 적당한 울음의 분량이 필요할 텐데, 형식적인 곡소리라도 들려야 할 텐데, 너무 적막하다. 무슨 곡절인지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나까지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는다. 곡비처럼 소리라도 내질러야하는데 지나치게 이성적이다. 평소에는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를 보다가도 툭하면 우는 내가 아니던가. 친구 경자가 안구 건조증이 생겨서 인공눈물을 넣는다고 했을 때 도리어 난 눈물이 너무 헤퍼서 불편하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일찍이 슬픔에 대해 면역이 된 것인가. 흔들림 없는 감정의 이유를 애써 찾아본다. 일 년에 한번은커녕 전체를 통틀어도 망자의 얼굴을 본 횟수가 다섯 손가락도 차지 않는다. 그러니 사촌동서지간이라 한들 특별히 정이 깊을 것도 애틋할 것도 없다. 허나 이건 구차스런 변명에 불과하다. 향초 타는 냄새가 어색한 시간을 시나브로 이끌고 간다. 소리가 유도하는 거친 울음만이, 울음이 지르는 소리만이 슬픔을 측정하는 최고의 이별 방식인 양 우리 엄마는 저승길 끝까지 따라오는 곡소리를 귀 따갑게 들어야했을 것이다. 오늘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풍경이었다. 


  테이블 저쪽의 누구는 돼지수육에 소주를 홀짝거리고 또 누구는 탱글탱글한 귤을 까서먹는다. 삶에 지쳐 눈물을 잃은 사람들은 저 행위도 분명 슬픔을 드러내는 표식일 게다. 그 힘으로 간신히 울음통을 달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면 세상이 바뀌었으니 조금 세련된 조문 형식이라 해도 되겠다. 어떤 것은 자세만으로도 기도가 된다지 않던가. 다들 고개를 박은 채 시간 모서리를 깎으며 최선을 다해 먹는 일에 열중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닐 것이다. 


  약간의 차멀미를 안고 돌아온 늦은 밤이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로 하현달이 조등(弔燈)처럼 푸르뎅뎅하게 걸려있다. 어둠이 에워싼 그 곁에 드문드문 몇 개의 별이 별일 아니란 듯이 반짝거린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안간 내 기억의 곳간 한쪽에 숨죽인 어린 내가 별을 센다. 철이 없어서 울지 못했던 그때와 철이 있어도 울지 못한 오늘이 조용히 포개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