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34회 근로자문화예술제 금상] 시소 / 고미령

희라킴 2016. 9. 11. 20:45


[근로자문화예술제 금상]


시소

                                                                                                                               고미령


 신혼집 빌라 앞마당엔 오래된 시소가 하나 있었다. 원래 동네 아이들 놀이터 용도로 만들어졌던 곳인데, 점차 아이들이 외지로 빠져나가자 망가지고 스러진 놀이기구 틈 속에서 유일하게 건재한 모습으로 남은 녀석이었다. 소꿉놀이하듯 갓 신혼살림을 차리고, 서로의 얼굴만 봐도 흐뭇하여 어쩔 줄 몰랐던 우리부부의 놀이중의 하나는 바로 시소를 타는 것이었다. 서로가 같은 위치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나는 언제나 바닥에 고정이고, 위로 올라간 남편은 내려올 줄 모른다. 하지만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내가 점차 앞으로 다가가면, 가라앉았던 남편이 서서히 올라와 어느덧 균형을 맞춘다. 동심으로 돌아간 것처럼 서로의 무게중심을 조율해가며 상대를 공중에 띄워주기도 하고, 바닥에 '쿵' 하고 내려주기도 하는 재미는 지금도 추억하는 그때만의 소중한 기억이다.


 결혼 후 10년…… ​나와 시소를 타는 상대가 시어머님으로 바뀌었다. 나와 한참 재미있게 시소를 타 주던 남편은, 어머니와 나 사이의 불편한 기류를 감지한 이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정 가운데에 자리잡고 내쪽과 어머니쪽을 번걸아보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면서 어머니쪽으로 움직여갔다. 나 혼자 공중에 덩그머니 떠 있다.


 2남 1녀중에 막내였던 남편은 그 누구보다도 어머님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더군다나 제일 막내였기에 결혼하기 전까지 어머님과 함께 한 시간이 제일 길었고, 디스크 수술 이후 한동안 몸이 좋지 않아 거동이 불편했을 무렵의 어머니를 업고 다니며 의원을 다녔던 애틋한 기억때문인지, 어머님과 남편의 관계는 늘 긴밀했다. 신혼집을 시댁과 불과 10분 거리에 위치한 곳으로 정한 건, 언제든 어머님이 부르시면 바로 달려가겠다는 효자남편의 의지라는 것을 몇 년 후에야 깨달았다.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사부터 시작하여 병문안을 와준 시부모님의 지인知人들에게 답례인사를 드리러 가고, 제사 때 쓸 물건과 음식을 나르는 일은 지방에서 사시는 큰 형님 내외대신, 늘 막내인 우리의 몫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게 되면서 어머님이 혈액암 진단을 받게 되자, 이제는 남편과 내가 병원과 집을 오가며 병수발까지 도맡아 해야 했다. 부모를 모시는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간의 우리부부만이 감내해야 했던 고단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느 순간, 어머님 편으로 기울어져있던 남편을 내 쪽으로 억지로 끌어당겼다. 하중荷重이 나와 남편에게 쏠리자 시소가 일순간 균형을 깨면서 어머님쪽이 공중으로 '훅'하고 올라간다. 순간, 이건 아니라는 남편 얼굴이 일순간에 일그러지며, 남편은 다시 어머님쪽으로 기울어졌다. 화가 잔뜩 나버린 나는, 며칠 간병인에게 어머님의 간호를 맡기고 병원을 나와 버렸다. 내 삶속에 신혼 때의 우리 부부는 없는 것만 같았다. 병실엔 안부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병상의 어머님께 말씀드리고 싶었다. "저희만 왜 그렇게 당신에게 매여 있어야 하나요?" 라고…….


 큰아들, 작은 아들 할 것 없이 자식이라면 누가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었지만, 정해진 날짜에 병원비 일부를 부치고 "동서, 어머님 괜찮지? 동서가 수고가 많네…" 하며, 어머님 일은 제 손을 떠난 일인 듯 얄밉게 말하는 형님내외를 보며 불만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병간호를 등한시하는 모습을 본 남편이 어느날, 큰소리로 울먹이며 말했다.

 "앞으로 길어야 3년이야. 힘없고 불쌍한 노인네, 좀 봐주면 안 되겠냐? 당신, 나를 사랑하긴 한거야? 나를 사랑하면, 내 부모도 사랑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니?"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은 나의 모든 일에 귀기울여주고 손내밀어주는 따뜻하고 자상한 남자였다. 남편은 아내인 나를 사랑하면서도, 갑작스런 암선고를 받으신 어머니가 언제, 어느 순간에 이생의 끈을 놓아 버릴지 몰라 늘 불안해하며 안타까워했다. 


 아버님대신 일찍 가장의 짐을 지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신을 낳고 키우고 때론 호된 가르침으로 이끌어주셨던 '어머니'란 여자가 가여웠던 것일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준 어머니와, 매일 병실에서 항암제를 맞고 자신의 몸무게마저 맥없이 잃어가면서 날이 갈수록 오그라드는 앙상한 모습의 한 여자를 시소 저편에 앉혀 놓고 부끄러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속엔, 그간 가까이 살면서 딸아이를 수시로 돌봐주셨던 고마운 기억이나, 맞벌이를 하느라 바빴던 우리에게 밑반찬을 챙겨다 주셨던 기억, 당신의 건강을 위해 가끔 산에 가셔서 캐냈던 산더덕과 산삼을 모두 자식들에게 먼저 양보하셨던 고마운 일들은 이미 지워져 버리고 없었다. 자식이 보살피는 만큼, 어머니, 당신께서 우리를 품어주시고 아껴주셨던 작은 마음들이 쌓여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도 좋은 자양분이 되었을 법도 한데, 나는 늘 드린 것보다 어머님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했던 소소한 것들을 손가락으로 셈하곤 했다. 마치 부모님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얻어내는 일은 당연한 일인데, 당신을 돌보는 일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일처럼, 어쩌면 황당한 일감이라도 억울하게 대신 떠맡은 듯 속상해 하면서 말이다.

 다시 시소 위에 앉았다. 이젠 서로 기울어지고 애써 자기쪽으로 기울이려고 노력하는 부끄러운 힘겨루기란 없다. 결혼을 통해 새로운 가족구성원이 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는 분명 생각의 차이로 인한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음을 안다. 그러나 삶이 버거워 무게를 진 사람이 앞으로 다가가 앉고, 조금 더 이해의 아량을 가진 사람이 뒤쪽으로 자리를 잡으면, 어느덧 마음의 시소는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균형을 잡게 된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힘을 더 키우려고 가족을 이용해서도 안되고, 편가르기를 하기 위해서 끌어당겨도 안된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 그를 낳아준 어머니, 그리고 당신의 며느리이기 전에, 당신의 딸도 될 수 있는 나. 지방과 해외로 흩어져버린 큰아들과 큰 형님의 빈자리가 외로워 막내인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것이 마냥 자식에게 의존하려는 당신만의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댄 건, 어쩌면 당신을 맡아달라는 무거운 짐을 고통스럽게 대신 지어달라고 얹으신 게 아니라, 당신의 허虛한 마음을 막내아들과 며느리의 온기溫氣로 나누고 싶어 그저 껴안고 보듬고 따뜻하게 닿고 싶었던 마음이었으리라…‥

 힘겨루기를 벗어나니, 세 사람이 타는 시소는 훨씬 여유롭다. 이전에 부담스러워했던 어머니의 가녀린 손을 따뜻하게 꼭 쥐어본다. 영양분이 모두 빠져나간 마른 고목나무 뿌리와도 같은 손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얼굴에 가져다 대기도 한다. 어머니의 손을 잡는 순간, 빠른 전류가 전해지듯, 이내 전달된 사랑이 어머니 마음속에도 느껴지셨는지, 어머니께서 내 편으로 넘어오신다. 두 여자가 한 편으로 쏠리니, 이젠 남편 혼자 공중에 '붕'하고 떠버리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이제는 어머니께서 한 가운데 앉아 남편과 나의 무게중심을 잡아 주신다.


 "우리 자손들…. 서로 아껴가며 잘 살그라…."

 '쿵닥쿵닥' 장단을 맞춰가며 마음의 시소는 흥겨운 방아를 찧는다.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한 놀이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