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지
최장순
“뻘낙지 한 마리면 보약 한 첩 먹는 거랑 같지라.”
여인의 걸쭉한 사투리에서 갯내가 풍긴다. 해풍에 그을린 얼굴에 자리 잡은 세월의 굴곡이 토속적인 음성과 잘 어울리는 그녀. 마디 굵은 손으로 움켜쥐고 흔들어 보이는 낙지가 잠든 내안의 욕망을 일으켜 세운다.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늙었을까. 두루뭉술한 몸에서 배어나오는 진한 삶의 갯내.
‘지쳐 쓰러진 소도 벌떡 일으켜 세운다는 낙지 힘을 받아볼까?’ 그녀가 권하는 곳에 일행은 자리를 잡는다. 세련된 도회지 얼굴에 보얗게 분을 바른 얼굴이었다면 우린 아마도 다른 집으로 걸음을 옮겼을지도 모른다. 낙지와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 그녀가 묘하게 어울린다. 음식점 넓은 창으로 성큼 바다가 다가선다. 마침 썰물 때여서 드러난 개펄이 여인의 끈적한 음성처럼 마음에 달라붙는다.
주문한 연포탕이 준비되기 전 내 놓는 밑반찬. 상에 놓인 음식을 훑던 시장한 눈들이 한곳으로 모아진다. 하얀 접시 위에 꼼틀거리는 도막난 세발낙지. 머리도 몸통도 구분되지 않은 마디들. 이미 칼을 받은 몸이지만 생명은 끈질긴 것. 아직도 본능적으로 꿈틀댄다. 잔인할수록 미각은 싱싱한 것이어서 바다 한 접시를 오가는 손이 바쁘다.
‘묵은 낙지 꿰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목숨이 끊어진 낙지는 다루기 쉽다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싱싱함은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 고통으로 몸부림칠수록 잔인한 식감은 커진다. 토막처진 육신들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삶을 붙잡는 중이다. 뻘밭을 기던 흡반의 힘으로 접시에 들러붙는다. 쾌감이듯 돋아나는 미각. 젓가락을 잡은 손에 힘을 모으며, 네가 아무리 용을 써도 산 입을 당해낼까, 한 토막 집어 기름장에 찍는다. 입 안 가득 참기름 냄새, 뒤 이어 쏴아 바다 향이 번진다. 그렇다고 순순히 기를 꺾는 낙지가 아니어서 혀에 닿는가싶더니 입천장에 달라붙는다. 혀에 휘감기는 맛을 오독오독 어금니로 씹으면 육즙이 미각의 돌기를 자극한다.
“사람들은 어린 낙지를 씹으면서, 앳된 여자를 품어 녹이는 것을 떠올려 말하곤 하였다”
소설 한 대목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번지는 입가의 웃음을 닦는다. 여인이 냄비를 가져와 가스레인지에 얹는다. 육수 속 박속이 하얗게 웃고 있다. 야채를 곁들이고 낙지는 접시에 따로 들고 온다. 이게 바로 여인이 말해준 보약인가 보다.
조금 전에 먹은 세발낙지가 차지면서도 여린 맛이라면, 지금 눈앞의 낙지는 거친 파도와 닮은 성깔 있는 맛, 질퍽한 뻘의 맛이다. 세발낙지가 어린 여자라면 이 낙지는 원숙한 여자, 세상의 단맛과 쓴맛에 몇 번이고 버팅기다가 마침내 문드러진 눈물을 쏟는 중년의 여인이다. 그래서였을까, 여인과 낙지가 잘 어울려보였던 것은. 낙지를 움켜쥐고 냄비에 넣는 여인의 손놀림을 보며 이제야 낙지의 참맛을 볼 것 같은 생각에 침을 삼킨다. 그 손에서 개펄에 엎드려 평생을 사는 여인들의 삶이 쏟아진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뻘에 널을 밀고 가는 여인들의 삶은 바닥을 닮았다. 뻘은 바닷사람들의 바닥이다. 그 질퍽한 곳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어 아낙들은 날마다 뻘을 뒤진다. 바닥은 삶을 헤쳐 나가는 근성을 키우고, 그 근성은 뻘에서 제 냄새를 풍겨 삶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 그래서 낙지는 뻘의 맛, 진정한 바다의 맛, 단내 나는 바닥의 맛이다. 산다는 것은 낙지처럼, 세상의 바닥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건너가는 것이 아니던가.
냄비에 입수한 여덟 개의 다리, 아니 여덟 개의 팔이 몸부림을 친다. 무엇이라도 잡아야 한다는 듯 냄비 가장자리로 기어 나온다. 필사의 몸부림과 식욕은 비례하는 걸까? 낙지를 바라보는 눈은 연민과 희열의 이율배반. 금세 흡반은 꽃처럼 피어난다. 드디어 용트림하던 바다 한 마리가 숨을 거둔 것이다. 시원한 국물로 목을 축인 다음, 박속 향에 우러난 토막 난 바다를 포식한다.
포만감을 안고 음식점을 나오는데 몸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저 바닥의 근성을 배워보지 않겠느냐고, 지나가던 갯바람이 뻘밭으로 내 등을 자꾸만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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