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말 / 최민자

희라킴 2016. 9. 23. 19:14



말 


                                                                                                                                          최민자


 내가 즐겨 보는 TV프로그램 중 하나는 '동물의 왕국'이다. 거칠고 냉혹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의 세계를 들여다보노라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치게 된다. 인간의 삶과 동물의 생태를 견주어 보면서 약육강식 같은 생존의 질서를 실감하기도 하고, 모성의 위대함이나 종족 보존의 본능 같은 생명체의 공통분모를 헤아려 볼 수 있어서이다.

 대체로 나는 작은 동물보다는 큰 동물, 큰 동물 중에서도 맹수를 좋아한다. 내 마음 어디에 잔인하고 포악한 근성이 숨어있는 것일까. 갖은 술수와 협잡, 파벌싸움 대신 힘의 논리 하나로 천하를 평정하는 명쾌한 파워게임이 좋아 보여서일까.

 

 임금 왕王자가 새겨진 시베리아 호랑이의 얼룩무늬를 확인하고 싶어 혼자서 대공원에 간 적이 있다. 한낮의 햇볕을 피해 늘어지게 자고 있던 우리 안의 호랑이, 왕으로서의 위용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늠름하지도 않았다. 잠에 취해 하품을 해대는 그의 모습에서 산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포효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사자의 풍성한 갈기가 멋져 보인 적도 있다. 사람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사자의 눈빛, 그 눈빛으로 먼 데를 보며 무심한 듯 새끼를 돌보는 수사자의 오만함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그놈이 하루에 스무 시간 가량을 낮잠으로 소일하며 암놈이 사냥해온 먹이를 제일 먼저 독식하려드는 게으르고 비열한 놈팡이임을 알았을 때, 쑥대강이 같은 봉두난발이 더 이상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말이 좋아졌다. 근육질의 놈, 윤 나는 피부, 차랑차랑한 말총, 길다란 속눈썹.... 네 발 달린 짐승 중에 그 만큼 잘 생긴 동물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한다.

 

 말은 서 있을 때보다 달릴 때 더 아름답다. 낮은 구릉사이를 나는 듯 휘달리는  필마, 경쾌한 발굽 소리와 함께 옛 성을 향해 가는 사륜 마차의 준마, 적진을 향해 힘차게 내닫는 군마, 무리 지어 뛰어 노는 야생마까지,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가 바람을 가르며 사라지는 역동적인 실루엣은 언제나 나를 감동시킨다. 야성적이면서도 눈빛이 순한 아프리카의 단거리 선수 같다고 할까.

 

 말이 매력적인 것은 그 생김새나 생동감 넘치는 동태뿐이 아니다. 말의 충직성, 복종심, 인내 같은 그가 갖고 있는 천품 또한 마음에 든다. 그가 야비하고 꾀가 많은 성품이거나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잔학한 성질을 지녔다면 변덕스런 나는 벌써 그것들이 싫어졌을 것이다. 외모만 보고 빠진 사랑에 금새 염증을 느끼는 것처럼.

 말은 착하고 겸손한 동물이다. 주인이 제 맘에 들지 않아도 눈을 치뜨거나 정면으로 희떱게 쳐다보는 법이 없다. 늘 아래로 십오 도쯤 비낀 시선이다. 기분이 틀리면 히잉히잉 성마른 울음소리를 내며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무모한 뒷발질로 고집쟁이 흉내를 내 보기도 하지만, 풀을 먹는 짐승이 악할 수야 있겠는가. 배불리 먹여주고 부드럽게 달래주면 그뿐, 순한 심복이 되어 금방이라도 푸르릉 콧바람을 불어댄다. 제 운명을, 제 직분을 너무나 잘 아는 청지기와도 같이.

 말은 순종할 줄 아는 동물이다. 푸른 초지를 달리던 야성이 유전자 어디엔가 기억되어 있으련만, 원시적인 생명력을 잠재우고 산다. 타고난 운명대로, 길들이는 대로 경주마도 되고 잡마도 된다. 운이 좋고 혈통이 좋은 녀석은 승용마나 종마로 대우를 받지만, 박복한 놈은 일평생 힘겹게 짐수레를 끄는 역욕마役用馬로 살아야 한다.

 어릴 적 나는 구루마라 불리는 나무 마차에 나뭇단이나 모래, 세간을 실어 나르는 불쌍한 말들을 많이 보았다. 몸뚱이에 채찍 자국이 선명한 늙고 지친 말들, 모진 팔자를 참아내느라 그들의 눈은 언제나 조금 슬퍼 보였다. 일편자를 신기느라 발바닥에 대갈을 두드려 박아도, 엉덩이에 뜨거운 불 도장을 찍어도, 앙심을 품고 공격하는 법이 없다. 제 목숨이 위태로운 전장에서조차 말은 결코 사람을 밟고 달리지는 않는다 한다. 그런 인내와 순종심이 인류의 역사 속에 가장 오래, 꾸준히 함께 해온 친근한 동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이리라.

 영화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도 아마 말이 아닐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스칼렛의 말, 칼바퀴 마차로 경기장을 질주하던 '벤허'의 말, '오케이 목장의 결투'같은 많고 많은 서부극의 말까지, 말은 언제나 멋지고 날렵한 모습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역사 속의 영웅들도 말과 함꼐였다. 박혁거세의 말, 김유신의 말, 화랑 관창의 말에서부터, 알렉산더, 징기스칸의 말, 관우의 적토마까지, 말은 그 주인과 운명의 순간들을 공유하는 충복이자 동반자였다. 경주의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의 말갖춤馬具은  말 주인의 신분만큼, 얼마나 호화롭고 사치스럽던가. 신라 왕족의 무덤임이 분명한 그 능에서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린 채색화 두 점이 발견되었다. 왕이 타던 말의 옆구리에 대던 장니障泥에 그려진 그 그림은 왕의 영혼을 하늘에까지 실어나르기를 바라는 천마도天馬図였다. 무덤의 이름을 천마총이라 명명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한다. 살아서 뿐 아니라 사후의 세계까지 주인과 함께 하는 영험한 동물로 추앙 받기도 하였던 것이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은 유라시아 평원을 달리던 늠름한 기마민족이었을지 모른다. 시베리아나 경주 근방에서 공히 발굴되는 금 세공품이나 묘제墓制에 대한 연구가 그런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들이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 벌판을 거쳐 한반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도 말의 기동력이 없다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얼마 전에는 소 떼가 휴전선을 넘었다. 우리 나라 남단 제주도의 말이 민족의 이동 경로를 거꾸로 훑으며 북으로, 서西로 질주해 볼 날은 언제나 올 것인가. 휴전선을 넘고 만주를 지나, 드넓은 유라시아의 초원을 항햐여, 잃어버린 꿈을 향하여.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중물 / 정여송  (0) 2016.09.24
희아리 / 정여송  (0) 2016.09.24
옹기 / 윤승원  (0) 2016.09.22
9월의 봉숭아 / 이복희  (0) 2016.09.21
토출 / 주인석  (0) 2016.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