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봉숭아
이복희
9월이면 유난히 눈에 밟히는 꽃이 있다. 봉숭아다. 담장 밑, 공원 한 귀퉁이, 동네 길섶에서 웃자라 쇠어버린 봉숭아. 다른 어떤 풀이나 꽃보다도 시든 봉숭아만큼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없다.
여름내 지천으로 피어 있어도 마음 없이 바라보던 꽃, 싱싱한 선홍빛 꽃잎이 어서 꽃물을 들이라고 유혹할 때도 건성 스쳐 지났다. 손톱에 물들이던 여름밤의 설렘을 잠깐 떠올려 보지만 먼 유년의 뜰에 두고 온 꽃일 뿐이었다.
하지만 구월에 만나는 봉숭아는 달랐다. 어느새 굵어진 마디와 억센 줄기, 그리고 빛바랜 꽃송이가 비로소 마음에 안겨오는 것이다. 이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고 여름 한철 맛본 꽃의 영화도 사라진, 철지난 봉숭아에는 내 어린 날의 유치한 객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미처 시들어버리기도 전에 뽑혀졌던 봉숭아 몇 그루가 눈에 어른거린다. 아주 오래 전 일인데도 선명하다. 훅 끼쳐오던 흙냄새며 시든 풀의 향기까지 언뜻 코로 스쳐가는 것 같다. 여름내 꽃잎을 따 손톱을 물들였던 봉숭아를 마치 몹쓸 것이나 본 듯 뽑아냈던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대청마루에는 언제나처럼 마실 온 이웃 아줌마들이 둘러 앉아 있었다. 더러는 마루 끝에 걸터앉기도 하고 아예 길게 드러눕기도 했다. 밑도 끝도 없는 화제들이 방향 모를 바람처럼 어지럽게 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저만큼 떨어져서 혼자 놀던 어린 내게는 귓등을 스치는 소음일 뿐. 그런데 그 수다스런 소리들 사이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한 마디, 어쩌다가 그 말만 그렇게 귀에 쏙 들어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 이 집은 왜 저렇게 봉선화를 묵히고 있담. 더 쇠어버리기 전에 뽑아버리지 않고….”
누군가가 큰일이라도 난 듯 호들갑스럽게 말하자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왜요? 그냥 두면 어때서”
“모르는 소리, 철 지나도록 봉숭아를 묵히면 딸이 시집 못 간 채 늙는다는 말 못 들었어?”
말도 안 된다는 둥 맞는다는 둥 왁자지껄 주고받는 소리들은 이미 들리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난 나는 곧장 꽃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줄지어 서있는 봉숭아 줄기를 잡아채기 시작했다. 웃자란 봉숭아 줄기는 마디가 굵고 억세어 잘 뽑히지 않았다. 두 손으로 움켜쥐고 힘껏 잡아당기자 흙이 뒤집히며 봉숭아가 뿌리째 올라왔다. 이번에는 아줌마들의 왁자한 웃음소리가 뒤통수를 울렸다.
“저것 보게, 시집은 가고 싶은 모양이여”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는지 아닌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손에 뽑힌 여러 포기의 봉숭아가 볼품없이 화단가에 널브러져 있던 광경만 지금도 생생하다. 아직 더위가 머뭇거리고 있던 구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날 어른들을 통해 알게 된 속설이 신통하게도 현재진행형이 되어 있음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말로 주술이 되어 내 운명을 얽어맸을까. 아니다. 그런 식으로 힘들게 지탱해온 내 의지를 하찮게 비하할 생각은 없다.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성격이라는 평소의 지론엔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그날의 어이없는 행동에 핑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은 딸이 셋이었다. 말하자면 형제애의 발로(?)였을 것이라고 한다면 좀 궁색한 변명일까.
해마다 봉숭아는 여전히 피고 진다. 하지만 애먼 봉숭아를 뽑으며 감히 운명과 맞장 뜨려 했던 어린 여자아이는 이미 없다. 순리를 알아 세월에 실려 가는 내가 있을 뿐이다. 세상모르던 그때는 시드는 것들에 대한 연민도 애달픔도 없었지 싶다. 마치 봄이나 여름에 가을의 조락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수우족 인디언들은 구월을 ‘풀이 마르는 달’이라 부른다고 한다. 아라비아 숫자로 단순히 순서를 표기하는 서양력에 비해 훨씬 서정성이 짙다. 삶의 지혜를 자연으로부터 얻으며 자연 그대로 살았던 인디언들의 영혼이 느껴지는 말이다. 풀이 마르기 시작하는 구월이면 봉숭아도 어김없이 그 빛을 잃는다.
풀이나 꽃잎은 시들어 갈 때 그 향이 더 진하다. 싱싱할 때의 향기와는 다른, 쓸쓸하면서도 다감한 향이다. 코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맡는 향기라고나 할까.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생명이 보내는 마지막 선물이다.
지금에야 어린 날의 치기였다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찌 그 시절에만 있었겠는가. 살아온 세월을 갈피갈피 들추다 보면 얼른 덮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풀처럼 순순히 물기를 말리고 싶다. 치기가 되었던 혈기가 되었던 아니, 오기라도 상관없다. 예쁜 주머니 하나 만들어 모두 모아서 잘 말리고 싶다.
구월의 바람결에 마른 풀 향기가 묻어있다. 물기 걷힌 내 추억의 향도 그 속에 섞여 있을까.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