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2016년 미래에셋 문학상 대상] 난전 / 김현숙

희라킴 2016. 8. 28. 13:09


[2016년 미래에셋 문학상 대상]


난 전 

김현숙

 

  오늘도 어김없이 판이 벌어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 초입에는 궂은날을 제외하고 매일 서는 난전이 있다. 규범이 허용하지 않아도 사람이 정으로 허락한 곳이다. 그날 할머니들의 개인적인 사정에 따라 한두 분이 빠지기는 해도 판을 접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예닐곱 명의 할머니가 각자 성미에 맞게 펼쳐놓은 품목들은 그 면면이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하다. 같은 조건에서 정정당당하게 해 보자는 것이다.


  가끔 입 터진 석류나 말린 연근, 바지런한 도토리묵이 얼굴마담으로 나와 앉는 일은 있어도 할머니들의 주력상품은 제철 노지에서 자란 배추, , , 호박, 상치와 같은 다분히 기본적인 것들이다. 말끔한 포장도 계산된 진열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도 없다. 하지만 그 덕에 할머니들의 푸성귀는 서로의 살갗을 맞대고 우열이 없는 자리에서 편견 없는 햇빛아래 자체발광이다. 이 난전 덕분에 내 밥상에서 기본이 빠지는 일은 웬만하면 없다.


  손님이 다가서도 일어서기는커녕 어서 오라는 인사말도 없다. 오히려 공손하게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추는 쪽은 손님이다. 그제야 할머니는 그저 줄 것처럼 가 가소.’ 한다. 내 집인지 네 집인지도 몰라보게 붙어 앉은 옆집 좌판에 슬쩍 눈이라도 갈라치면 대번 그 집게 나으면 그거 가 가소.’ 한다. 매번 그 당당함에 반해버린다.


  지난여름이었다. 숨이 채 죽지도 않은 뙤약볕아래서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차양도 없이 이른 좌판을 펴고 있었다. 벌써 나와 앉은 저 할머니는 한여름 시정을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뭔가 특별한 것이라도 있어 서둔 것일까 이미 궁금해진 마음이 좌판을 향하고 있었다.


  깔끔하게 손질된 호박잎, 굽은 허리대신 돋은 가시로 면을 세우고 있는 오이, 순서를 기다리다 제 풀에 지친 열무가 좌판의 전부다. 수수한 것이 난전의 미덕이라지만 주변머리 없는 좌판의 살림살이가 할머니마저 궁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나마 야들야들한 호박잎이 눈에 밟혀 쪼그리고 앉았다. 덩달아 웅크리고 앉아 내 눈치를 살피는 할머니의 눈이 고단해 보였다. 할머니는 마수걸이라면서 호박잎이 담긴 소쿠리를 기껍게 비웠다. 호박잎 두 소쿠리치고 받아든 봉지가 제법 목직했다. 예상외 무게가 실린듯해서 살피려는 순간, 봉지바닥이 물컹하고 잡혔다.


  세상에, 뭔가 했더니 내 손에 잡혀 나온 것은 일회용 비닐봉지에 똘똘 뭉쳐 싼 된장이었다. 겨우 어린애주먹만한 크기였다. ‘된장을.’ 얼른 이해를 못하겠다는 내 얼굴에 대고 할머니는 집 나서기 전에 막 끓인 강된장 입니더.’ 했다. ‘.’ 그러고 보니 된장을 거머쥔 내 손바닥이 미지근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체온 탓이라고 여겼는데 그것은 된장의 온기였다.


  육천 원이라는 말에 만원을 건넸다. 할머니가 거스름돈을 찾는 사이, 하늘과 척진 듯 구부러진 할머니의 허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깊은 그 포물선이 절박해 보였다. 거스름은 필요 없다고 말한 순간 와 이카노 나도 필요 없다.’ 그때 할머니의 눈동자 지금 내게 적선 하는 거냐.’ 따지듯 말하는 자존감 가득한 눈동자, 그날 내가 만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눈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내게 거스름돈을 주지 못했다. 대신 건넸던 비닐봉지를 도로 가져가더니 남아있는 호박잎을 미어지게 넣고 하루 장사밑천이 되었을 강된장까지 통째 담아 내 손에 다시 들려주었다. 터질듯 한 호박잎 봉지와 강된장 한통. 내가 받아든 그것은 할머니의 당당한 자기 확신이었으며, 고단한 삶과 가난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할머니의 신념이었다.


  혁신이라는 이름아래 지금 내 집 뒤에도 밤낮없이 판이 벌어지고 있다. 균형 있는 지역발전과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는 인프라 구축, 개성 있는 이미지 창출이라는 연장을 들고 무자비하고 날카롭게 지름길을 냈다. 그 길에서 그들만의 좌판을 펼치고 있다.


  물과 풀, 도롱뇽의 허락 따위는 상관없는 또 다른 이름의 난전이다. 이 난전 탓에 생명과 삶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감각이 균형을 잃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밤이면 베란다 창문을 열고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 묻는다. 등을 끄면 별이 쏟아졌던 그 시간을 훔쳐간 자가 누구냐고. ‘분노하고 분노한다. 사라진 별빛에 대해.’


  낡은 육법전서를 겨드랑이에 차고 제도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묵었다는 이유로 기득권의 터전을 통째로 들어냈다. 논밭을 깔아뭉개고 흙을 엎었다. 나무가 뽑혀나간 자리엔 지금 뿌리도 없는 무생물들이 한시적인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시멘트와 철근 아스팔트 위에서는 생명이 움트지 않는다. 획일화된 도시화를 표방하는 지금의 문명은 자꾸만 흙을 멀리하려는 것에 모순이 있다.


  평생 일궈온 땅을 내어주고 멀리 가지도 못한 할머니들이 등산로 입구에 좌판을 깔고 앉았다. 흙에 씨를 내리고 그 흙에서 자란 할머니들의 열매는,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원시적인 토대를 바탕으로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쪼그리고 앉아야 들여다 볼 수 있고 들여다봐야 그 본질이 보인다. 내게 이 난전은 단지 일용할 양식만을 주는 곳이 아니다. 가장 작고 낮은 곳에서, 흙을 외면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가치와 기본의 중요성을 거듭 일깨워 주고 있다. 그리고 씨를 뿌려야 꽃이 피며 그 꽃자리에 결실이 맺힌다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을 거스르지 말라고 한다.


  내가 가진 형편에 비해 넘치도록 베풀기만 하는 이 난전에 오늘은 비가 내린다. 흙이 고스란히 비를 받아들인다. 물기를 머금은 대지에서 새 생명의 비린내가 확 올라온다. 비릿한 것에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고, 난 부르르 몸서리를 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