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국을 태우며
김애자
오늘은 종일토록 눈이 내리다가 그치고, 그쳤다가 또 퍼붓곤 한다. 산정에 도열한 나목들의 오연한 기개가 설무(雪霧)에 잠기고, 마당에 쌓이는 눈은 희고 희어서 푸른 착시를 일으킨다. 가을은 붉은 치맛자락을 감아쥐고 쫓기듯 급류를 타고 건너가더니만, 겨울은 옥양목 도포 자락을 날리며 쉬엄쉬엄 넘어가실 모양이다.
매무새 깔밋한 박새가 마당 가에 세워 놓은 솟대에 자발없이 올라앉아 꽁지깃을 까불거린다. 필시 배가 고파서 날아온 모양이련만, 하는 짓거리가 햇갑기 짝이 없다. 쌀이라도 한 줌 주고 싶은데 천지가 눈이다. 어디에다 먹이를 뿌려야 할지 망설이는 동안 녀석은 개울 건너로 포르릉 날아가 버렸다.
다시 고즈넉하다. 추녀 끝에 매달려 얼음의 결정(結晶)인 듯 명징한 울림을 떨구던 풍경마저 미동도 않는다. 눈발 속에서 미동도 않는 침묵이 오히려 발원(發願)의 중량보다 더 무겁다.
일찌감치 군불을 지피곤 질화로를 내다 불을 담았다. 엄동설한에 외풍을 막아주는 데는 화롯불보다 더 좋은 난방 기구는 없는 성싶다. 발갛게 이글거리는 잉걸불을 묵은 재로 다독다독 누르고, 마른 산국 몇 송이 뿌려 서재로 들여놓았다. 실낱같이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를 타고 향긋한 꽃내음이 방안을 채운다.
산국은 된서리를 맞은 후에야 고운 빛깔과 향기로 제자품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오상고절(傲霜孤節)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산국을 따다 말려두고는, 가끔씩 차로 우려 마시거나 화롯불에 넣어 피우곤 한다. 산촌에 살면서 적적함을 달래는 유일한 즐거움이다.
채국(綵菊)할 즈음에는, 해만 설핏해도 한기가 살품으로 파고든다. 쇠잔하게 사그라지는 잡풀 사이에서,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꽃무더기에 묻혀 앙증맞도록 작은 꽃송이를 따다 보면, 시정이 절로 인다. 거실 벽에서 굴원의 어부사(漁父辭)를 떼어내고, 도연명의「잡시(雜詩)」를 걸어 놓은 것도 대쪽 같은 선비의 결기보다는,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는 은자(隱者)의 모습이 더 좋아서다. 그분의 눈에 유연히 비쳐드는 남산과, 그 산에서 뿜어 나오는 아름다운 기운과, 날아가고 날아오는 새들의 울음에서 자연의 진의(眞意)가 있다고 한 시구가 좋아서다. 아니 그 진의 앞에서 말을 잊었다는 언외(言外)에 담긴 시 맛이 좋아서다. 그런 맛을 내기까지 운명으로 달관하고, 비애로 달관하고, 체념으로 달관한 고매한 정신이 좋아서다. 이와 같은 경지를 헤아려 볼 만큼 나이테를 감은 내 연륜이 고마워서다.
사람이 그럴싸하게 나이를 먹는 것은 좋은 일이다. 대체적으로 60대로 접어들면, 삶의 굴곡을 여러 번 넘나들었던 경험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을 분별할 줄 알게 되고, 더 이상 미래를 생각하며 새로운 희망을 키우거나 이상(理想)을 품지 않는다. 대신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진다. 이루지 못한 회한 때문에 젊은이들을 보면, ‘나도 저 나이라면, 아니 30대만 되었어도 좋겠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급하던 성격도 누그러지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들어도 속에다 오래 묵새기지 않는다. 불쾌한 일일수록 빨리 마음에서 털어버리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상대를 위해서도 좋은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식성도 변한다. 단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쓴것으로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여벌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의 교육과 결혼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점이다. 어깨에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놨으니 얼마나 홀가분한가. 게다가 직장에서도 은퇴를 했다면 시간의 얽매임으로부터 놓여나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맘먹고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참 괜찮은 나이다.
다만 뇌의 세포가 점점 퇴화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게 잘 외우던 단어가 막히거나, 대화 도중에 책의 제목이나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말을 더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때로는 전날 밤에 가방에다 잘 챙겨 넣은 서류나 도장 같은 것을, 다음 날 아침에는 엉뚱한 곳에서 찾느라 법석을 떨어댄다. 이럴 때는 정말 한심스럽다. 그렇지만 어찌하겠는가. 이것도 자연의 순리인 것을.
오류선생도 이런 연륜의 어름에서「잡시」를 짓지 않았나 싶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지나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칠 줄 모르는 시정에 묻혀 살면서도, 세상의 소리를 귀 밖으로 물리칠 줄 아는 초연함은, 이러한 순리를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내가 사는 곳은 앞도 산이고 뒤도 산이다. 첩첩산중이어서 눈이 오면 빙판 진 산굽이를 돌아나갈 수 없어 봄이 올 때까지 발이 묶인다. 외로움이 깊어지면 수척해진 그림자를 끌고 휘적휘적 산으로 들어간다. 겨울산은 노년의 빛이다. 성장만을 위한 치열한 향일성(向日性)으로 눈부시던 지난날의 흔적이라고는 마른 잎새뿐이다. 낙엽을 밟거나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다가 바람이 불면 걸음을 멈춘다. 나무들이 온 몸을 흔들며 울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무들은 자지러지는 소리로, 수직상승으로만 치솟은 낙엽송은 밑동까지 흔들며 깊은 울음을 토한다.
그러나 바람은 무정하다. 이쪽 산에 나무들이 울음을 그치기도 전에 저쪽 골짜기로 옮겨간다. 다만 울지 않는 것은 사슴뿔을 단 고사목 뿐이다. 바람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옴짝도 않는, 이끼 끼도록 폐쇄된 무심이 서글프다. 이미 존재의 의미를 잃은 무심과, 바람을 안고 우는 유심 사이에서, 죽어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깊은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눈발이 다시 날린다. 밖은 이미 어둠에 잠긴 지 오래다. 시계의 초침이 분침을 향해가고, 분침은 시침을 따라가고 있다. 내가 아무리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없는 시간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셉 에디슨의 말처럼 “오늘이란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건만, 또 그 내일이 나의 오늘로 막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산국을 집어 화롯불에 뿌린다. 계절이 타오르는 명주비단 자락에 은유가 깃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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