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짖지 않는 까마귀 / 공순해

희라킴 2016. 3. 21. 08:59

 

짖지 않는 까마귀

 

                                                                                                                              공순해

 

 길엔 인적이 없다. 하늘은 흐리다. 송전철탑만이 우뚝,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필경은 광풍이었을 바람에 꺾인 아름드리 나무 밑둥은 썩어 들고, 잘라 뉘인 나무 둥치들은 흐린 속에서 배를 드러낸 몸을 말리고 있다. 어디엔가 버들강아지나 개나리라도 피었으련만 뵈지 않는다. 노란 꽃이 보여 반색하듯 돌아 보면 그게 아니다. 하긴 잃어버리고, 포기한 어디 뿐이랴.

 

 길은 갈래다. 포장된 길은 끈을 풀어 던진 듯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리고 옆으로 자갈길이 직선 비탈로 냅다 내리닫고 있다. 길을 따라가는 송전철탑들은 스매미쉬 쪽에서 와서 클라하니 블루바드쪽으로 뻗어가고 있다. 포장 도로를 돌아 걷던, 자갈길을 곧장 걷던, 산책하는 사람이 취향에 맞게 선택할 있도록 한 구조다. () 설계한 사람은 어느 쪽을 선호했을까.

 

 우리는 천천히, 구불대는 포장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잔뜩 일어서 우북한 풀섶엔 물방울들이 가득하다. 겨우 잎을 내밀고 있는 딸기 덤불, 마구 자란 풀숲이 정돈 머리칼 같다. 그때였다. 마리가 머리 위를 스친다. 뭔가 움직이는 생물이 있다는 점에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 보자 마리가 날아온다. 몸이 꺼먼 . 다시 보니 뿐이 아니다. 두세 마리가 저공으로 풀숲을 훓으며 우리가 가야 앞쪽으로 내려 앉는다. 까마귀다.

 

 시커먼 그놈들은 순식간에 떼를 이루어 풀숲을 덮는다. 비록 히치콕의 영화 <>만큼은 아니어도 섬칫한 느낌이 충분히 느껴질 만큼 많은 숫자의 새떼다. 순간 입에서 시비 같은 말이 불쑥 튀어 나온다. 까마귀는 위세롭게 하늘을 제압하며 까악 까악 짖어야 까마귀지, 내려 앉아 풀숲을 뒤지며 먹이 찾는 무슨 까마귀냐. 너희가 피짜 쪼는 비둘기 떼라도 된단 말이냐. 말에 남편이 웃는다. 지렁이라도 찾고 있나 보지. 그러고 보니 위엔 허옇게 불은 지렁이의 주검이 여기저기 보인다. 언제나 축축한 여기 날씨에 늘상 보는 풍경이지만 마다 흠칫하게 된다. 시체 먹는 놈들이 치사하게 겨우 지렁이로 입치레 한다고? 본능적인 불쾌함으로 나는 다시 퉁명을 떤다. 지렁이 주검도 싫고 까마귀도 싫다. 검은 색의 불길함, 음침한 울음 소리를 누가 좋아하랴. 두보(杜甫) 말을 빌면, 생각이나 정서도 없이 시끄럽게 짖어대기만 하는 놈들이다. 게다 우리가 떠나온(?) 사회에선 거친 죽음을 까마귀 밥이 된다고 표현했다. 까마귀 같은 ! 싫은 대상을 지칭할 이같이 말하기도 했다. 흔한 통념으로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였다.

 

 어려서 나는 까마귀와 까치를 구별하지 못했다. 나란히 놓고 뜯어 보면 모를까, 머리 위를 스치는 모습만으론 수가 없었다. 까맣고 깍깍 까악 울어대는데 뭐가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하지만 기다리는 설날 전날을 까치 설날이라고 하는 보면 까치는 좋은 새였고, 꽝꽝 어는 추운 겨울이면, 동구 나무 꼭대기 까마귀가 얼어 죽었대, 라고 말하니, 까마귀는 좋지 않은 감정에 쓰이는 새였다. 그러므로 까마귀에 대한 불쾌함은 사회 통념에 길들여진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 기준은 둘이다. 좋거나 나쁘거나. 선택의 기준은 다수의 힘이다. 사회 구조 속에선 다수가 ()이니까. 여기에서 까마귀는 길조다. 그러기에 짖어야만 하는 까마귀란 생각도, 어쩌면 다수 쪽에 서서 길들여진, 선택의 여지가 없던 타의의 관념인지도 모른다.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겨우 새를 구별하게 되었을 , 영화나 문학 작품 속에서 묘사되는 까마귀도 음침한 존재였다. 나쁜 쪽으로 내몰린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 목표물을 덮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날짐승 자체였다. 욕망이란 이름으로 어떤 목표물을 조준, 획득해 보지 못한 나로선, 자신과 전혀 다른 짐승의 모습이 그저 무섭기만 했다. 날쌔게 날아서 지상의 목표물을 나획하는 위용(?)만이 날짐승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召命)으로 보였다.

 

 하지만 요즘 대개의 생물들은 소명을 잊고 살아간다. 아니, 깨닫지도 못한 상태에서 상실 당하고 있다. 욕망이 욕망을 낳고 욕망이 애초의 욕망을 구속한 나머지, 가속화 되어 이젠 자연도 인간의 제도 속으로 진입된 세상. 자연인가 욕망인가 선택 여부조차 희미해져, 평화를 상징하던 비둘기는 환경 재해 새로 전락되고, 남녀 구별도 없어져 남남(男男)이거나 여여(女女) 짝짓기 하는 인간들도 늘고 있다. 전쟁만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나? 디지털화 생태계 속에서 편리란 이름의 욕망도 이처럼 인간성을 부식 시킨다. 오늘 , 새로운 윤리의 기준은 개인화와 실제적 효용 뿐이다. 그러니 비상을 잊어버린 새들이 풀숲에 내려앉아 먹이 찾기에만 골몰한다 해도 어찌 그들만 나무랄 있겠는가. 그래서 산책길에 정리된 생각은 다음과 같게 되었다.

 

 까악 까악 까ㅡ
까마귀는
허공에서 짖어야 까마귀.

오늘은 폐업했나, 일제히 풀숲에 내려앉아
서로서로
풀숲에 주둥이를 박고 다정히 비비고 있다.

마지막 활강을 마친 나머지 마리도
풀숲에 내려 앉아 조용히 쭉지를 접는다.

비상(飛上) 잃어도
오늘 필요한 것은 젖은 토막 지렁이.

어두워 오는 하늘가
그러나 바람은 정녕 부드럽다.

 

클라하니 블루바드까지 내려갔다 돌아오는 길에 아까 자리에 다시 보았다. 내심 까마귀 떼들이 날아가고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풀숲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아예 조용하기만 하다. 주위를 둘러봐도 움직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늘을 분할하는 전선줄만이 그저 무섭게 머리 위를 내달리고 있다. 대체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여전히 길은 한적하다.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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