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기 / 김희자
온몸이 땀투성이다. 이맛전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작은 몸을 감싼 옷이 젖어있다. 하늘색 꿈이 담긴 이불 위에서 앙증맞은 아기가 몸을 웅크리며 뒤집기를 하고 있다. 안간 힘을 쓰며 뒤집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내 주먹에도 힘이 불끈 들어간다. 오뉴월의 무더위는 아기에게 인내심을 요구했다. 힘겨워하는 모습이 안쓰럽지만 내 입가에는 미소가 절로 번진다. 나는 지금 이십 년이 넘은 사진을 보고 있다.
사진 속에는 대학 졸업반 딸의 갓 난 모습이 들어있다. 용을 쓰는 아기가 가여워 바로 눕히기도 하고 노리개로 시선을 유도해 보았지만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뒤집기는 매일 이어졌다. 땀띠가 돋고 기저귀까지 찬 둔한 몸이었지만 도전은 계속되었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지칠 즈음에야 뒤집기는 끝이 났다. 작은 체구에서 우러 나는 근성은 어디에서 왔는지 놀라웠다. 보통 아기들은 생후 육칠 개월이 되어야 뒤집기를 시작하지만 첫딸은 백일을 넘기자마자 시도했다. 이 킬로그램을 간신히 넘기고 태어나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이른 뒤집기로 근심을 덜어주었다.
세상에 나와 한 번쯤 성장의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만삭을 채운 아기는 미숙했다. 체중은 미달이었고 뱃속에서 거꾸로 자란 탓인지 다리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얼굴보다 더 큰 눈가리개를 하고 보육기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며 모두들 "저게 사람이 되겠냐?" 며 입을 모았다. 장애아는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눈에 진물이 나도록 울었다. 산모가 울면 시력이 나빠진다고 말렸지만 자궁 속에서 제대로 키워주지 못해 자책했다.
모든 것이 미숙했던 아기는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달포 동안 보육기에서 자랐다. 혹시 아기가 잘못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군걱정과는 달리 품으로 온 아기는 병치레 없이 성장했다. 성장이 빠르다 싶더니 여느 아기들보다 일찍 뒤집기를 시도했다. 아기들은 태어나 몇 달이 흐르면 뒤집기를 하며 세상으로 나아간다. 누워만 있던 아기가 뒤집기를 하는 순간 세상을 향한 위대한 도전은 시작된다. 두 팔과 다리를 흔들며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첫 도전을 하는 것이다.
뒤집기에 일찍 도전했던 아기는 기는 것도 빠르고 걸음마도 앞서 떼어놓았다. 말 또한 일찌감치 배워 두돌잡이가 되기 전에 동요를 따라 불렀다. 분별에 일찍 눈 뜬 아이는 부모의 뒷바라지보다 스스로 노력하고 도전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어내어 화들짝 놀라게도 했다. 성인이 된 아이는 지금도 치열한 항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과 맞서고 있다.
주먹만한 딸이 강단 있게 뒤집기를 하는 모습을 보니 가라앉아 있던 내 심장이 박동한다. 뒤집기에 주저하는 나 자신을 세차게 꼬집는다. 한길만 들어서면 다른 길을 기웃거리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조용하고 평안함을 추구하는 성격 탓에 다른 세상에의 도전을 주저했다. 한곳에서 빛을 발하거나 진득하게 밀고 나가는 구석은 타고났지만 새로운 것에 맞서는 일에는 굼뜨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소심한 성격 때문이다.
사는 일 또한 나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뒤집으면 보이는 또 다른 삶에 호기심이 가다가도 도전장 한 번 던져보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망설였다. 소심하고 찬찬한 성격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 있으나 빤히 보이는 보물섬을 코앞에 두고도 다가서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한 소지하고 있다. 그 때문에 탐탁스럽지 않은 직장에서 십 수 년 동안 일을 했다. 조롱에 갇힌 새처럼 구속되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속울음만 삼켰다. 그렇다고 한곳만 멀뚱히 바라보며 옴짝도 못한 것은 아니었다. 뒤집기를 몇 번이나 도모하려 했으나 이래저래 저울질만 하다가 끝내 실패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은 일요일만 쉬고 있다. 주 오 일 근무가 자리를 잡았지만 토요일과 공휴일에도 일을 한다. 그렇다고 특별수당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불만이 목젖까지 차올라도 배움이 부족한 탓이라며 화를 꾸역꾸역 삼켰다. 두 딸이 소학교에 입학하는 날에도 손을 잡고 갈 수 없었고 발을 맞추어야 하는 운동회 때도 함께 뛸 수 없었다. 이제는 그런 정형에서 벗어나고 싶다. 천장만 바라보고 있어도 사는 일에 불편함은 없겠지만 익숙한 것에 바라보던 시선을 뒤집는 아기들처럼 나도 뒤집기를 해야 한다.
세상에 온 진정한 보람은 낯설고도 새로운 곳을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낯설게 하기는 세상을 좀 더 깊고 의미 있게 보는 길이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에라도 시도를 해야 한다. 아기들의 뒤집기처럼 세상을 향한 모든 도전에는 뒤집어 보는 방식이 스며있다. 시선의 뒤집기와 선택의 뒤집기, 생각의 뒤집기를 통해 조금씩 진화해야 한다. 뭇 사람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을 뒤집어야 전진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마땅히 생각하는 것에 시선의 의문을 제기하여 뒤집어 보는 것이 세상의 개화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나 혼자서 가는 길을 택하여 방향을 돌려봐야 또 다른 길이 보인다. 지금껏 도전에 머뭇거리기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지만 뒤집기를 하는 딸의 사진을 보며 도전을 꿈꾼다. 미완의 꿈만 꾸는 것만 아니라 마흔의 끝자락에서 나는 뒤집기를 꾀하려고 한다. 더는 미루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 일이다. 좀스러운 나에게는 한판 승부 같은 뒤집기가 정녕코 필요하다.
글쓰기 또한 매한가지다. 아직은 달필에 이르는 경지도 아니오, 배짱 또한 두둑하지 못하지만 극복을 해야 한다. 지금껏 내가 구사했던 틀에서 벗어나 모퉁이를 돌아야 한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의 조심스러움보다는 이제는 좀 더 변화된 글에 도전장을 내밀어야 한다. 진정한 작가는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눈을 크게 뜨고 세상을 보아야 한다. 심안을 거쳐 영안까지 이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지녀야 깊어질 수 있다. 글목이란 글이 새로운 길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나아감이란 낯설게 하기, 곧 뒤집기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문향에서 탈피하여 변화를 주는 것이다.
재미삼아 올해의 운세를 보았다. 성취가 다소 늦더라도 승산이 있는 해라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마라 했다. 여태껏 요행에 의지하거나 운세를 믿으며 살아오지 않았지만 용단을 내려 새로운 변화에 도전해보려 한다. 대담하지 못하고 조심성이 지나치게 많은 성격 때문에 지체되었던 것들을 청산하여 나를 찾는 동기를 만들어야겠다. 세상일에는 행운도 불행도 그저 오는 법이 없다고 했다.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길에는 흔들림이 따를 수도 있다. 도전 뒤에 따르는 고난쯤은 참아낼 수 있다. 이참에 씩씩하게 이겨내어 자신감도 배양해볼 요량이다.
새해의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지났다. 꽃피는 봄날을 기다리며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뒤집기와 승부를 벌여볼 생각이다. 내 나이 마흔 아홉. 살아온 날들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진 나이에 겁도 없이 뒤집기를 시도하려 한다. 나에게는 한판승이나 다름없는 새로운 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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