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스크랩] 가시에 기대어 / 정성화

희라킴 2016. 3. 20. 13:33

 

 

 

가시에 기대어


                              / 정성화


생선을 발라 먹으며 가시 끝에 맞닿아 있던 살점을 생각한다. 얼마나 아팠을까. 한사도 쉬지 않고 찔러대는 가시를 몸속에 담은 채 발랑발랑 물속을 헤엄쳐 다녔으니 어쩌면 물고기는 그것을 가시로 여기지 않고 그냥 품고 살아야할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가시’라고 부르며 그 가시에 찔릴까봐 조심하는 이는 생선살을 발라먹는 우리들이다. 남의 살을 아프게 찌르는 것이 가시라면, 생선에게 있어 우리들의 이齒牙는 바로 가시인 셈이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아가씨, 이 깨찰빵 속에는 뭐가···” 묻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깨찰빵이 아니라 찰깨빵이에욧”하며 톡 쏘는 소리를 한다. 그 말의 위세에 눌려 얼른 빵에서 손을 거두었다. 찹쌀 반죽에 까만 깨를 넣어 만든 빵이니 찰깨빵이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리겠지만 그녀의 마음은 날카로웠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는 빵을 앞에 두고서.

많은 손님들에게 시달리는 데서 오는 짜증 때문인지, 주인에게 꾸지람을 들은 직후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느닷없이 볼멘 소리였다. 한 마디 하려다 그만 두었다. 가느다란 손목으로 제 팔 길이만한 빵 집게를 들고 서 있는 앳된 그녀를 나는 내 동생뻘로 보아주기로 했다.


인간의 입이 다른 동물에 비해 앞으로 튀어나와 있지 않고 평면적인 이유는 인간이 진화되어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이빨로 다른 동물을 공격하는 기능이 퇴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외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입을 이용해 상대방을 공격하고자 하는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 언성을 높이고, 상대방을 짓밟기 위한 험담을 예사로 하며, 어떤 경우에는 입 하나로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의 혀는 뼈가 없어도 뼈를 부순다고 하지 않는가.


선생님들의 꾸중 스타일도 여러 가지다. 팔 들고 서 있거나 바닥에 꿇어앉기를 시키는 정통파가 있는가 하면,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치는 즉결 심판형도 있다. 가장 싫었던 것은 입으로 독침 내지 가시를 뱉어내는 스타일이었다. 마음에 난 생채기에는 요오드팅크를 바를 수가 없어서 아주 오랫동안 아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모르고 계셨다.

 

고등학교 2학년 말에 학생회장 선거가 있었다. 반 아이들의 추천이 고마워서 후보 등록을 마치고 나오는데, 학생과장 선생님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불러 세우셨다. “너는 너의 집 형편을 생각해보고 등록한 거냐?”고 하셨다. 불독같이 생긴 그 선생님의 눈에 나는 뜯어먹을 고기 한 점도 붙어있지 않은 뼈다귀였던 것이다. 가시에 찔려 바람이 새어나가는 풍선, 그런 신세가 될 수는 없었다. 나는 사퇴하지 않았고 당당히 학생회장에 당선 되었다. 그것이 바로 가시의 위력이라 하겠다.


물고기는 다른 것들에게 뜯어 먹히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제 몸 속에 가시를 눌러왔을 것이다. 가지런하게 도열해있는 물고기의 가시를 보면 예사 장치가 아니다 싶다. 그래서 갈치를 발라 먹다 보면 이건 가시가 아니라, “내 살점에 손을 대시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어요” 라고 외치며, 사람의 입을 향해 일제히 치켜세우고 있는 전투적인 창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에 비해 식물의 가시는 다소곳한 방어형이다. 선인장은 사막의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제 잎을 가시로 바꾸었다고 한다. 장미는 아름다운 꽃을 보호하기 위해, 탱자나무는 노랗게 익어가는 탱장를 위해 뽀족한 가시를 낸다. 그러고 보면 식물의 가시는 물고기의 그것과는 달리,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은 애틋한 속마음이 줄기를 뚫고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일종의 방어수단인 셈이다.


우리들의 몸속에 기척 없이 숨어있는 가시 또한 그런 ‘식물성 가시’가 아닐까 싶다. 나약한 우리 자신을 지켜보려는 마음이 굳어진 것이기에 남을 고의적으로 찌를 생각은 별로 없는 가시다. 간혹 시기, 질투, 중상 모략하는 마음이 뭉쳐져서 돋아난 ‘동물적 가시’가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 함부로 나를 짓밟으려 들거나, 허락 없이 나의 꽃이나 열매를 가지려 한다면, 내 속의 가시는 인정사정없이 그의 살을 찔러댈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간단치가 않다. 찔린 사람 못지않게 나도 아프다. 그것은 내 속의 가시가 나부터 먼저 찔러야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적군과 아군 둘 다 찌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가시가 지닌 원초적 슬픔이다.


어느 골목길을 걷다가 높은 담장 위에 가시철망을 몇 겹으로 두른 집을 보았다. 만일 달빛 한 가락이라도 걸쳤다가는 이내 갈가리 찢기고 말 것처럼 가시철조망은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 담장 아래를 지나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가시를 지닌 것들은 대개 외로울 수밖에 없다. 가시에게 있어 외로움이란 더 아픈 가시다. 외로운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자신의 어디에선가 조금씩 가시가 자라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인생은 가시밭길이라고 한다. 우리들 마음속에 한 그루 아니면 그 이상으로 가시나무를 키우기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들 교양이나 체면, 위선이라는 잎새로 그들의 가시를 가리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못된 성질을 부린 날 저녁, 나는 반성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의 못된 면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더 애통해한다. 숨기고 싶었던 가시를 들켰기 때문이다.


내 속에 들어있는 가시로 인해 외롭고 괴로울 때가 많다. 그러나, 힘들 때에는 힘을 내라며 내 몸의 허한 곳을 찾아 침을 놓아주는 가시, 자만에 빠져들면 금새 눈치를 채고 나를 더 세게 찔러대는 고마운 가시도 있었으니, 어느 면에서 나는 내 속의 가시나무에 은근슬쩍 기댄 채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묵은 체증을 내리기 위해 손가락 끝을 따듯이, 깜박깜박 졸고 있는 내 정신을 이따금 따주는 일. 나는 그 일까지도 가시나무에게 부탁해놓고 있다. 생선이란 가시에 찔리면서 가시를 발라먹는 그 맛이듯이.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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