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거(冬安居) / 김희자
폭설과 한파가 유난히 잦은 겨울이다. 맹추위가 일삽시 꼬리를 내린 틈을 타 거둠이 끝난 논 자락 사이를 걸었다. 텅 빈 들에는 잔설이 희끗희끗하게 남아 있다. 마음이 흐르다 머무는 곳엔 그리움이 시나브로 고인다고 하였던가. 들길 따라 발걸음을 옮겨온 곳은 언제나 가슴 한 편에 자리를 틀고 있는 연지蓮池이다.
연지는 내 서헌書軒에서 창밖으로 시선만 두면 보이는 못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봄물이 돌고 저물녘이 되면 서산을 넘는 해를 품는다. 들녘 사방에 저녁 거미가 깔려오면 하늘의 다리을 연못으로 데려와 밤마다 키운다. 어린 연잎이 연못을 뒤덮는 오월이면 베란다에서도 연둣빛 새순과 햇빛의 어울림을 느낄 수 있다. 봄볕에 앙증맞은 연잎이 아가 손처럼 자라나고 작열하는 태양이 못에 쏟아지면 아리따운 홍련이 고개를 사리포시 내민다. 못 가 들꽃에게 질세라 한껏 뽐내던 연꽃이 이울고 나면 가을날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연대가 누렇게 시든다. 들녘을 성큼성큼 건너온 동장군이 대지를 얼어붙게 만들면 꽁꽁 언 연못에도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겨울 연못은 텅 비어서 더 충만하고 고요하다. 표정 또한 갖가지다. 지난여름 고운 자태를 뽐내던 연꽃들이 동안거에 들어가 수행 중이다. 연대에서 떨어져 나간 연이 연밥을 품고 얼음 위에 누워 있다. 길이 멀다고 가지 않을 것인가. 고개를 숙인 연대가 정진하는 수도승처럼 미동도 않는다. 연대들은 긴 겨울을 견디며 안거가 해제되는 날까지 정진한다. 일몰 무렵 소멸을 꿈꾸는 노을에게 자신을 내맡기고 깊은 심연으로부터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며 비우는 연습을 한다.
모든 생물들은 온전하게 비울 때 자유로워진다. 스님들이 동안거에 들어가듯 연대들도 지난날의 흔적들을 버린 채 선에 들어 있다. 연대들의 명상이 승려들이의 동안거 못지않게 깊다. 얼고 허허로운 못 속에서 뿌리들은 어떤 꿈을 꿀까? 이곳 연지는 씨앗을 품은 열매들이 겨울을 견뎌 낸다. 씨앗을 품고 침잠하는 연의 동안거다. 얼음이 박힌 자궁 속에서도 단단한 생명의 불씨를 겨우 내내 기른다. 들녘의 겨울바람은 차고 눈이 내리지만 혹독한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화려한 시절을 탐할 수 있으랴.
동안거는 깨달음을 주는 내일이다. 고치 속에서 때를 기다리는 누에처럼 연은 죽은 척 웅크리고 겨울을 난다. 얼음 위에 나뒹구는 열매는 절정의 여름을 꿈꾼다. 하늘은 아득할수록 깊고 강물은 깊을수록 푸르듯 겨울을 잉태한 고통이 클수록 연꽃은 고울 테다. 아직 겨울의 끝은 아득한데 꿈을 벼리는 날은 깊어만 간다. 연지에는 몇 번의 추위가 더 올 것이고 연꽃을 닮은 맑은 눈도 몇 차례 내리리라.
선정에 든 연대를 보며 연못가에서 나의 화두를 만지작댄다. 나는 겨울이면 움츠린 듯 소심해진다. 하나 오늘은 꿈을 꾸며 날을 세우고 싶다. 들길 사이로 난 길만 따라오면 선방鮮房과 같은 연못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미처 몰랐었다. 산속 깊이 든 절집이라야 꼭 참선을 할 수 있을까? 눈과 마음만 열려 있으면 선방이 지천인 것을!
을사년乙巳年에 태어난 나는 동절기를 유난히 탄다. 날이 차지면 어느 계절보다 활동량이 시들해짐을 부인할 수 없다. 동면에 드는 뱀처럼 웅크리고 활동하기를 주저한다. 태어난 시기까지 봄이라 그런지 언 겨울을 두려워하며 맥을 못 춘다. 하지만 동면에 든 뱀이라고 잠만 잘까? 아니리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준비하며 겨울나기를 하는 것이다. 동안거에 들어간 저 연대들처럼 나 역시 한 해를 마무리하며 동안거에 들어간다. 혼신을 다했던 글쓰기를 잠시 접고 봄이 되기를 기다리며 영혼을 채운다.
긴 겨울 동안 책을 읽는다. 미루어 두었던 장편소설을 읽거나 채 만나보지 못했던 수필을 읽으며 내면에 알곡을 쌓는다. 시든 연대처럼 동면에 들었다고 정신 또한 죽은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스스로의 끊임없는 정진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성숙한다. 늘 그대로인 것은 변화하지 않는 삶과 같고 꿈도 내일도 보이지 않는다. 차갑고 시리다고 몸만 움츠리고 있을 수는 없다. 다가올 봄을 위해서는 저 연대들처럼 영혼의 살을 찌워야 한다. 세상에 공으로 얻는 것은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쉬지 않고 정진을 하면 만화방창 꽃 피는 날이 올 것이다.
연못가의 나무들도 잎을 버리고 홀가분한 모습으로 깊은 겨울 속에 서 있다. 고요한 저 나무들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 번뇌와 갈등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계절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봄을 기다린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다를 바 없다. 화려하다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한 선에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내공을 쌓아야 더 크게 나아갈 수 있다. 예인藝人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나의 동안거는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낮아져 더 깊고 그윽하게 성숙하는 수행이나 진배없다. 다가올 봄날을 기다리며 겨울나기에 든 저 연대처럼 나는 지금 동안거冬安居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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