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Once upon a time)/ 손광성
누님을 따라 흥남부두를 떠난 것은 1950년 12월 23일이었다. 하지만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다음 해 1월 초순쯤이었다고 기억된다. 전쟁통이라 그랬을까? 처음 배에서 본 부산은 뒷산만 우뚝할 뿐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항구였다.
우리는 영도구 봉래동 한국도자기 근처 부두에 내렸고 선원들의 도움으로 조그만 사다리꼴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짐이라야 입은 옷 몇 가지. 더구나 돈이 될 만한 것은 금반지 하나와 은수저 두 벌이 전부였다. 그걸 팔아 며칠 먹을 양식을 마련했으나 그 후가 문제였다. 남은 돈으로 가위와 인두 같은 것을 샀다. 집주인 할머니의 도움으로 누님은 삯바느질을 시작할 참이었던 것이다.
나는 종일 부둣가를 서성이거나 약장수들 선전에 넋을 놓다가 저녁녘에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지루하고 따분한 나날들. 지(池) 씨라는 내 또래 아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마 구경꾼들 틈에서였을 것이다. 아이는 이웃 피난민 수용소에 산다고 했다. 나보다는 모든 게 적극적이었다. 겁이 나서 영도다리를 넘을 생각을 못하던 나에게 그것을 감행하는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최초의 재테크(?)까지 가르쳐 준 아이였다.
아주 따분해서 죽을 지경이던 어느 날 그 애가 말했다.
"너 돈 벌고 싶어?"
"싶지, 그런데 어떻게?"
"그럼 날 따라 와."
그렇게 해서 내가 간 곳은 40계단 근처에 있는 '민주신문'인가 하는 신문사였다.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바깥까지 철거덕철거덕 들렸다. 그 아이가 신문팔이였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우리는 거기서 신문이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저녁 서너 시쯤 어른 대여섯이 신문을 한아름씩 안고 나왔다. 그것을 신호 삼아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가 신문을 샀다. 그 아이도 신문을 한아름 받아가지고 와서 그중 20부를 나에게 주면서 팔아서 원금만 갚고 나머지는 나더러 가지라고 했다. 그 아이는 왼쪽 겨드랑이 밑에 신문뭉치를 끼더니 영도다리 쪽으로 달리면서 외쳤다.
"내일 아침 신문!"
나도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하지만 내 입에서는 "내일 아침 신문"이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냥 그 아이의 뒤를 따라 뛰기만 했다. 그러다가 "신문" 하고 손님이 부르면 그 아이가 잽싸게 뛰어갔다. 순간 다른 사람이 또 "신문"하고 부르면 내가 뛰어갔다. 언제 목청이 틔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사나흘 동안 매일 20여 부씩 신문을 받아서 팔았다. 원금을 갚고도 남은 몇 푼. 그건 내 생애 내가 최초로 번 돈이었다. 늘 먹고 싶었지만 참았던 빵부터 샀다. 버터를 발라 철판에 구운 다음 딸기잼을 듬뿍 발라 주었다. 그때 그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머지 돈으로 장작 한 단과 간 고등어 한 손을 샀다. 그것을 들고 집으로 갔다. 누님도 기뻐하시리라. 그런데 기뻐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날 꿇어앉게 하고는 추궁하는 것이었다.
"돈 어디서 났어?"
"……."
신문을 팔아서 번 돈이란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누님은 재차 다그쳤다.
"돈 어디서 훔쳤니?"
자칫 도둑으로 몰릴 판이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듣고 있던 누님이 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널 장사꾼이나 시키려고 예까지 데려온 줄 아니?… 나중에 어머니 만나면 무슨 낯으로 뵌단 말이냐…."
그러고는 다시 우셨다. 나는 다짐했다. 누님을 울릴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나보다 일곱 살이 위이시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날 업어 키우신 누님이기에 거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누님과 나는 저승이 있다고 믿었고 언젠가 내가 12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난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찾아와서 초량 뒷산에서 전시연합중학교가 개교했으니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누님의 승낙을 받고 바로 학교에 들어갔다. 그 아이는 며칠인가 다니더니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날 찾아오지도 않았다. 전쟁 중이라 공부보다 먹고살 길을 찾아 나서는 아이들이 많을 때였다.
교실이라고는 하지만 말이 교실이지 소나무에 매단 칠판 하나와 아이들이 날라다 놓은 돌로 만든 계단식 의자가 전부였다. 게다가 머리 위로는 전투기 편대가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부두에서는 예인선들이 군함을 예인하면서 계속해서 빽빽거렸다. 하늘이 천장이고 바람이 벽인 교실에서 우리는 모든 소음보다 더 큰 소리로 책을 읽어야 했다.
"Once upon a time. A dog found a piece of meat."
내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듯이. 그렇게 해서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던 것이다. 아니, 누님의 함경도 '북청물장수' 정신이 날 오늘의 나로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요새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고 혼자 웃을 때가 있다. 만약 그때 누님이 날 나무라지 않고 이렇게 말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잘했어. 일찍부터 돈 맛을 아는 것도 나쁘진 않지. 지갑이 비면 사내들이란 어깨부터 처지는 법이거든. 이왕 하려거든 죽기 살기로 덤비는 거야. 알았지?"
그랬더라면 혹시 지금쯤 재벌은 몰라도 준준 재벌쯤은 되어 있지 않을까? 그때는 전쟁 중이고 부산국제시장은 말 그대로 기회의 광장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기원전 서양 어느 나라에서 언제 살다간 사람인지도 모를 이솝의 우화나 달달 외고 있었으니 말이다.
'좋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숯 / 허효남 (0) | 2016.03.20 |
---|---|
[스크랩] 곰장어는 죽지 않았다 / 정성화 (0) | 2016.03.20 |
[스크랩] 언플러그드(unplugged) 풍경/ 정성화 (0) | 2016.03.20 |
[스크랩] 세탁삼매 / 반숙자 (0) | 2016.03.20 |
[스크랩] 부적 / 정성화 (0) | 2016.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