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시

[스크랩] 1992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모음

희라킴 2015. 12. 19. 12:41

 

 

하지/조재영(199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이들이 돌아간 빈 놀이터에
누군가 그리다만 집 한 채
누워 있습니다
막대기 하나 주워들고 금을 긋다보면
그 집은 점점 커져 일어서고
덩그마한 집 한 채 저녁 불빛에
따스합니다
방문앞 신발 두켤레
입을 오므리고 기대 앉아 있습니다
어스름한 달무리 지붕을 덮으면
문틈으로 새어나오던 불빛도 꺼지고
가물가물 비가 내립니다
비에 젖은 신발 두 켤레
서럽게 정답습니다
밤이 너무 깁니다

...........................................................

▶ 심사평 : 김주연 , 오세영
이번 신춘문예에 응모작들을 읽고 전체적으로 느낀 소감은 신인들의 시적 관심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인들은 항상 시대를 예감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러한 변화는 우리 시단에 새로운 경향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우선 시들이 들떠 있거나 과격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사회나 현실에 대한 발언이 줄어들고 시적형상화에 있어서도 메시지 전달 중심의 산문적 어법이 사라진 것 등은 그 중 두드러진 특징이다.

조재영씨의 '하지'나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는 신춘문예의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선 아름다우며 시의 미학적 완결성이 돋보인다. 삶의 일상적 정서를 건강하고 통합된 세계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사물을 보는 눈이 날카로우며 그것을 언어로 표출해내는 형상력도 뛰어나다.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본다"와 같은 표현은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가지 미흡하다 생각되는 것은 사상성 같은 것인데 아직 신인인 까닭으로 그의 시적 성숙을 기대해 본다.

▶ 조재영
1965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조재영(1992년 중앙일보)


 

화영운수 개봉역 차고
줄지어 서 있는 무표정한 시간들
사이로 비가 내린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기울어진 하늘의 한쪽을 밀어 본다
여학생들 플라타너스 밑둥을 툭툭치며
비를 피하고 깔깔 웃고
잎잎에 올라앉은 하늘은 暳♣見?들썩인다
플라타너스 흔들리며 흔들리잖으며
조금 내려앉는다
바람불면 다른 하늘이 올라타기도 한다
가지가 휘어 땅 가까이 닿을 듯하다
비그친 하늘은 어느새
쏟아낸 빗줄기만큼 가벼워지고
나무 등허리 주위로 넓어지는 한낮
말끔히 씻긴 차들이 시동을 건다
사람들은 차에 오르며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 본다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

...........................................................

▶ 심사평 : 김주연 , 오세영
이번 신춘문예에 응모작들을 읽고 전체적으로 느낀 소감은 신인들의 시적 관심이 상당히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인들은 항상 시대를 예감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러한 변화는 우리 시단에 새로운 경향을 예견하는 것이라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우선 시들이 들떠 있거나 과격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사회나 현실에 대한 발언이 줄어들고 시적형상화에 있어서도 메시지 전달 중심의 산문적 어법이 사라진 것 등은 그 중 두드러진 특징이다.

조재영씨의 '하지'나 '플라타너스는 잎들을 둥글게 말아올리고'는 신춘문예의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우선 아름다우며 시의 미학적 완결성이 돋보인다. 삶의 일상적 정서를 건강하고 통합된 세계관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 작품이 아닌가 한다. 사물을 보는 눈이 날카로우며 그것을 언어로 표출해내는 형상력도 뛰어나다. "젖은 하늘 한 귀퉁이 지그시 눌러본다"와 같은 표현은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한가지 미흡하다 생각되는 것은 사상성 같은 것인데 아직 신인인 까닭으로 그의 시적 성숙을 기대해 본다.

▶ 조재영
1965년 서울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와디-우리시대의 강 / 소을석(1992년 경향신문)

 

 

남김없이 흘러버린 강
바닥에 말라붙은 하늘을
낙타는 짜디짠 돌멩이가 되어 걷는다
수천년 전의 삼목 수림은 암각화로나 무성하고
사냥과 벌목에 기운찼던 장정들은
제 뼈 깎아내려 사막이 되었는지
인적 거둔 염천에 바람만이
모래기둥을 쌓다 무너져 내린다
 
탓한들 돌이킬 수 있으랴
제 발등 찍어 넘긴 도끼날
그 측은한 함락을 외로이 지키는
낙타는 또 수천년을
두고두고 바라보아도 쨍쨍한 하늘이 무심도 하지
두눈 가득 쏟아져 내려도 물기 한 점 맺히지 않는
어디에 그런 모진 침묵이 있는지
이글거리는 분노, 완강한 외면을 서성이는 발자국은
심장 위에 꽃수처럼 갈증의 화석을 심고
단조로운 풍경은 오래도록 쉬고 있어
갈색 관목의 시든 씨앗을 씹는 낙타의
기울어진 혹이 말라간다
 
무엇이 강을 쉬이 떠나게 했을까
 
불과 수십 년, 숲은 우거졌어도
웬일인지 강은 검게 말라붙어 다시 목마르고
사람들은 하나 둘 강을 떠난다. 그래도
이 땅의 하늘은 무심치 않아
비는 족히 내리지, 내려도
폐수로 굳어진 강은 풀리지 않고
낙타는 여전히 불타는 사막을 밟는다
다들 알고 있을까. 정작으로 두려운 것은
알면서도 제 살 썩히는 문명의 남용이라는 것을
집집마다 검은 강줄기를 하나씩 갖고서
맑은 날 하루 없이 오수를 흘리지
악취에 코를 막고 돌아서면서도
그것이 나를 등지는 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면서도 모르지. 하여
숲에서 생명을 발원한 강은 도시를 만나자 곧 숨이 막히고
아이들은 멀찍이 물러서서
강은 검은 것이라고 말한다
 
비가 내려도 목마른 강은
비 오지 않아 목타는 강보다
더 큰 절망으로 깊다
나날이 조금씩
발목을, 허리를, 목을 차오르는
비오는 날에도 검게 마른 강
하지만 떠날 수 없지. 단 하나의 생명을
이 땅에 심었기에 떠날 수 없지
낙타는 몸을 야위며
사라진 강을 찾아 사막을 횡단한다
자동차와 빌딩과 인간의 사막을 건너
생명의 향기가 풍기는 투명한 물내음
마음 속을 먼저 흐르는 푸르른 강을 찾아
 
* 와디(wadi): 비가 올 때만 일시적으로 흐르는 사막의 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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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김종해 , 김광규
소을석의 '와디'는 견고한 대칭적 구조로 힘들여 쓴 작품같다. "남김없이 흘러버린 강/ 바닥에 말라붙은 하늘을 짜디짠 돌멩이가 되어 걷는 낙타"의 형상이 "무엇이 강을 떠나게 했을까"를 축으로 회전하여 폐수로 굳어진 이 땅의 강을 절망하며 "자동차와 빌딩과 인간의 사막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으로 바뀐다.

사라진 강을 찾아 오아시스를 동경하며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행로를 우리 운명과 중첩시킴으로써 문명의 공해를 극복해야 할 당위적 결단을 묵시적으로 촉구하고 있다. 요즘 유행어를 빌린다면 이 작품은 환경생태시라고도 할 수있다. '우리 시대의 강'이나 '문명의 남용' 같은 관념적 설명이 없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진지한 주제를 밀도 있게 형상화한 솜씨를 평가하여 당선작으로 뽑는다.

▶ 소을석
1961년 전남 구례 출생. 한양대 중문과 졸업
 
 
 
 
 
열차에서/한승태(1992년 강원일보)
 
군용열차 뒤로 풍경이 달린다
기차 속에 나는 풍경처럼 너를
생각한다 너무 쉽게 해버린 말을
강촌 출렁다리 아래 물결을 푸른 군복을
심지어는 손톱이 자라고 때가 낀 것까지도
의문이 간다 왜 일까?
너와 이야길 하며 왠지
불안하고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이야길
피하며 하릴없이 웃음만 흘리고
네 얼굴을 피해 땅거밀 잡고
돌멩이가 새삼스럽다는 듯 만져보고
무엇일까? 네 얼굴을 보면

한 마리 나비가 생겼다는 너의 가슴속을
군용열차의 철로가 거미줄처럼 달리고
변명하듯 너의 얼굴을 훔쳐보며
또 다시 바보같은 웃음만 흘리고
목울대를 삼켜내던 말들의 새김질이
군용열차의 기적소릴 들으며
뚝 뚝 끊어지고 내 자신을 의심한다

뒤로만 뒤로만 달리는 풍경처럼 너를 생각하고
그 뒤에 쫓는 기적 소리처럼 유행가와
웃음소리가 먹먹한 내 눈앞을 튀어오른다.
 
 
 
 
 
세한도/박현수(1992년 한국일보)

 


1
 
어제는
나보다 더 보폭이 넓은 영혼을
따라다니다 꿈을 깼다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그 거리를
나는 눈물로 따라갔지만
어느새 홀로 빈 들에 서고 말았다
어혈의 생각이 저리도
맑게 틔어오던 새벽에
헝크러진 삶을 쓸어올리며 나는
첫닭처럼 잠을 깼다
 
누군 핏속에서
푸르른 혈죽을 피웠다는데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을 피워낼 수 있나

2
 
바람이 분다
가난할수록 더 흔들리는 집들
어디로 흐르는 강이길래
뼛속을 타며
삼백 예순의 마디마디를 이렇듯 저미는가
내게 어디
학적으로 쓸 반듯한
뼈 하나라도 있던가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래더미 같은 나는
스무해 얕은 물가에서
빛 좋은 웃음 한 줌 건져내지 못하고
그 어디
빈 하늘만 서성대고 다니다
어느새
고적한 세한도의 구도 위에 서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이란
시누대처럼
야위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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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홍윤숙 , 신경림 , 정현종
'세한도', '기타가 세워져 있는 골목'을 비롯한 박현수의 작품 7편은 모두 나무랄 데가 없다. '세한도' '깃발의 노래' 등에서 볼 수 있는 준엄한 자기성찰은 그냥 한 번 해보는 반성들과 다른 내적 출혈이 보이고 '기타가 세워져 있는 골목', '아버지의 벽시계' 등의 작품에는 사람의 삶을 감싸안는 따뜻한 애정이 넘치고 있다.

그러나 말할 것도 없이 적절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도 독자의 마음에 닿지 못한다. 박현수의 작품들은 뜻을 응축하여 효과를 배가하는 표현의 세련과 신선함도 갖추고 있어서 흔히 신인한테 바라는 요구도 충족시키고 있다. 작품들의 수준이 고른 것도 실은 마음이 든든한 점이다

▶ 박현수
1966년 경북 봉화 출생, 세종대 국문과 졸업




민들레 홀씨/ 김종욱 (199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당선작)



새 학기가 시작되고 우리들 가슴마다
설레이는 5월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교실 창밖에서 떠돌던 홀씨 하나
살포시 날아들었네
어느 바람의 손길이
널 이리로 보냈니
오그린 손옹당이 안에서 파르르 몸을 떤다
가도가도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뿐인
너의 기나긴 고통의 여정을 생각하면
정직한 노동이 어느 한 곳 뿌리내리지 못하고
멸시와 착취와 탄압이 샌드백이 되는
멍든 이웃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님은 네 종족의 대이동을 가리키며
떠남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운동이라고
말씀하시네 봄날 푸른 하늘에
혁명군처럼 자욱히 떠올라 날아가는 저들을 보면
어찌 믿음을 갖지 않으랴
너의 선조들이 절정의 꽃으로 피어났던 시절이 있었음을
그처럼 너희 또한
수많은 씨앗이 씨앗인 채로 남아
도시의 어두운 뒷골목을 맨몸으로 뒹굴거나
시커먼 차바퀴나 구두 뒷굽에 밟혀 이름도 없이 죽음을 맞더라도
끝끝내 살아남은 동지들이
이 땅 곳곳에 질긴 뿌리를 뻗어내려
새봄에 관한 꽃망울을 터뜨리리라는 것을
호오!
하고 입김을 부니
홀씨는 보송한 솜털을 흔들며 주저없이 햇살 속으로 날아오른다
가거라
힘찬 네 동지들의 대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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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이승훈 , 감태준
김종욱의 '민들레 홀씨'는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미적으로 비판하면서 아울러 우리 민족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형상화 하고 있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나고 현실인식도 강렬하다. 오늘 이 시대에 시를 쓰는 행위는 단순한 자연예찬이나 일상적인 삶의 넋두리가 아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상실한 미적 가치에 대한 질문과 동시에 잃어버린 삶의 토대를 찾아가는 고통스런 길이다. 김종욱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두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 김종욱
1963년 서울 출생, 중앙대 물리학과 졸업
 
 
 
 
 
귀향/김수영 (1992년 조선일보)

 

자, 빈 갯벌도 한잔 받지
집 떠난 지 칠년만이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 같은 녹슨 배의 철골이나
산비알 붉은 고구마밭에서 굴러내리는
살집좋은 바람 모두 한잔 들지
냉기처럼 다가서는 끝물의 바다
늘 돌아올 만큼씩은 비어서
망망대해에 있으면 그렁그렁하니 가슴팍을 비집는 마을의 불빛
눈알 뒤집으며 주먹다짐하기도 하면서
파도가 높음, 파도가 높음, 긴급구조 요망 긴급구조
깜박깜박 이 많은 골짜기를 감춘 세파에 자물쳐도
기다려라, 또 계속 가라
바람없는 낮엔 뜬 구름만 쇠주병에 담아 띄우기도 했어
때로는 잊혀지기도 해야할 젊은 날들처럼요
아버지에게도 바다는 길흉을 알 수 없는 심연이었을까
이미 예정된 깊이가 보이는 여정이었을까
하루 필요한 물과 기름을 받으면서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가
언제 덜컹 무심한 돌섬에 묻힐지 모르는 일
나는 같이 늙어가는 박씨의 사투리가 좋다
살아갈 날이 아침 안개속 첩첩으로 걸리믄
달포씩 밭그늘에 묵었던 지게가 낙락장송으로 뵈이고
지겟다리에 걸쳐둔 호멩이도 학모가지로 보이능거
아버지의 그리움도 갈수록 바람의 주먹이 매운
물주름으로 되돌아 왔었을까
한순간 바라다보고 있던 황량한 벌이
손바닥을 펴서 보여준
풀씨들의 집만 무수히 뚫린 외길로 통한 끝없는 황혼
담배만 되새김질하던 염소새끼까지도
흙먼지에 섞여 놓여나기만 하면
같은 피붙이를 기막히게도 찾아가는
떠도는 것만이 제 몫인 뿌리들은
이제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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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박두진 , 황동규
김수영의 '귀향'은 직접적인 체험이든 대리 체험이든 체험에서 나온 시이다. 그 점이 그의 스케일이 훨씬 더 큰 다른 작품 '흑고래'를 제쳐두고 이 작품을 택하게 만들었다. "늙은 노동자의 잔등같은 녹슨 배의 철골", "산비알 붉은 고구마 밭에서 굴러내?? 살집 좋은 바람" 같은 표현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험하고 고된 바다 생활 속에서도 "할망구짝난 바테리로 둘둘거리는 배" 같은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묘사도 체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 시에는 현장이 있고 깨달음들이 있다.
그 깨달음들의 끝에, 이 시의 마지막 몇 행에, '귀향'의 구조에 대한 하나의 절실하고 의미있는 깨달음이 자리잡고 있다. 그 깨달음은 삶이 무엇인가를 되생각하게 해준다.

▶ 김수영
1968년 경남 마산 출생, 경상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꽃피는 아버지/박종명 (1992년 서울신문)

 

그날, 아버지가 앉았던 풀밭 주위에는 풀뿌리들이 하얗게 녹이 슬었다
내디딜수록 풀 길 없이 조여지는 어둠 속에서 지상은 비틀거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지하영세 전자부품공장 안,
온몸에서 흘러내린 땀내와 함께
납이 타는 냄새로 통풍되지 않는 공장은
더 이상 썩지 않는 쓰레기장 같았다
하루종일, 납땜 인두만 만지고 계시는 아버지ㅡ
소화가 잘 안되신다며 빈 속만 자꾸 게워내셨고
가끔 머리카락이 힘없이 빠지곤 했다
식구들이 잦은 빈혈의 조각들처럼 구석에 쌓여 있는
전자부품들 위를 이빠진 선풍기가
심한 요동을 치며 어지러운 세상살이와 함께 돌아간다
끝내, 저녁이 되면
납땜 인두공 아버지 손은 오그라들고 펴지지를 않았다
가랑잎처럼 삭은 어머니의 손이 아무리 펴보려 해도
아버지의 굳은 손은 더욱 펴지지를 않았다
강물 쪽으로 외롭게 내린 뿌리들이
속살 찢어 서러움 빚어내고 우리 식구들은
별빛이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오그라든 손을 두고 밤새 울었다
 
납빛 십자가, 풀밭 속에 파묻혔다
어둠이 절뚝절뚝 사라진 풀밭 속에서
무언가 물을 수 없는 말을 던져 놓으며
꽃잎들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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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김종길 , 박성룡
박종명의 '꽃피는 아버지'가 당선의 영광을 안게 되었는데 이 작품도 많은 응모작품들처럼 노동현장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은 전자부품 공장에서 납중독으로 불구가 되었다가 돌아간 '아버지'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첫머리와 끝부분에서 풀꽃을 도입함으로써 시적 서정성을 무리없이 확보한 솜씨가 돋보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처절함으로만 일관되는 것이 아니라 승화된 슬픔으로 끝맺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의 경우처럼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이 상투성을 면하려면 작품마다 그 나름의 시적 장치와 서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박종명
1968년 인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

 

 

 

 

갈 수 없는 그곳 / 반칠환 (1992년 동아일보)

 

 

그렇지요,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지상의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다는 그곳은 도대체 얼마나 험준한 것이겠습니까.
새벽이 되기 전 모두 여장을 꾸립니다.
탈것이 발달된 지금 혹은 자가용으로, 전세 버스로, 더러는 자가 헬기로,
여유치 못한 사람들 도보로 나섭니다.
우는 아이 볼기 때리며 병든 부모 손수레에 싣고 길 떠나는 사람들,
오기도 많이 왔지만 아직 그 곳은 보이지 않습니다.
더러는 도복을 입은 도사들 그곳에 가까이 왔다는 소문을 팔아 돈을 벌기도 합니다.
낙타가 바늘귀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그곳,
그러나 바늘귀도 오랜 세월 삭아 부러지고 굳이 더이상 통과할 바늘귀도 없이 자가용을 가진 많은 사람들, 벌써 그곳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건너가야 할 육교나 지하도도 없는 곳, 도보자들이 몰려 있는 횡단보도에 연이은 차량,
그들에게 그곳으로 가는 신호등은 언제나 빨간불입니다.
오랜 기간 지친 사람들,
무단 횡단을 하다가 즉심에 넘어가거나 허리를 치어 넘어지곤 합니다.
갈 수 없는 그곳, 그러나 모두 떠나면 누가 이곳에 남아 씨 뿌리고 곡식을 거둡니까.
아름다운 사람들, 하나 둘 돌아옵니다.
모두 떠나고 나니 내가 살던 이곳이야말로 그리도 가고 싶어하던 그곳인 줄을 아아 당신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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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신경림 , 김주연
당선작 '갈 수 없는 그곳'은 인간의 정신적 지향을 추구한, 우리 시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가꾸어져야 할 작품이다. 세속과의 초월 관계를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는 세속에 대한 따뜻한 긍정과 함께 결국은 가야 할 초월적 세계에 대한 소박한 두려움이 있다. 이 시는 시 전체가 소박하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어리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함께 뽑힌 다른 작품 '가뭄'에는 놀라운 달관과 예리한 감수성이 잠복해 있다. 보다 성실한 훈련을 계속한다면 좋은 시인이 될 것이다.

▶ 반칠환
1963년 충북 청주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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