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당선 수필

[제4회 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당선작] 바람이 붑니다 / 박연이

희라킴 2019. 1. 21. 19:25


[제4회 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당선작]  


바람이 붑니다 


                                                                                                                                 박연이


바람이 붑니다. 한 여름 뜨거운 햇살을 견디다 못한 땅이 도저히 못 참겠다고 내뿜는 열기입니다. 숨이 턱 하고 막힙니다. 나는 주부입니다. 주부의 일상은 싱크대 가득 쌓여있는 그릇도 씻어 정리해야 하고, 여기 저기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빨아 널어야 하며, 샤워하며 묻혀놓은 욕실바닥의 때도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하기 싫어 뒤로 미루면 가슴만 답답해집니다. 차라리 하고 말지. 그래서 서둘러 봅니다. 시작을 하니 끝이 나네요. 곧바로 손님이 오신다 해도 반갑게 현관문을 열 수 있을 듯합니다. 오늘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손님을 맞이하는 대신 김용택 선생님이 사신다는 섬진강으로 여행을 떠날까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곳에서 부는 바람은 산도 있고 강도 있어 그런지 무척 시원합니다. 오랜만에 수많은 꽃과 벌레들이 어릴 적 나 살던 곳으로 안내해줍니다. 그때 그 시절이 이렇게 그리울지 그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지금 나는 산이며 강을 뛰어 다니는 어린 소녀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그 바람은 들판의 벼들을 고개 숙이게 하고 앞산 뒷산의 나무들에게 고운 옷도 입혀줍니다. 내게도 바람과 함께 중요한 손님이 오시려나 봅니다. 나는 아직도 목이 뻣뻣합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잘 아는 척 한다고, 못난 것을 감추기 위해 목에 힘을 주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혜민 스님 말씀대로 멈추어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하늘도 올려다보고, 땅도 내려다보고,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옆도 보았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바람은 조용히 불어와 나를 쓰다듬어 주고 갑니다. 눈이 감기고 고개가 숙여집니다. 바람과 함께 온 중요한 손님은 바로 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였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겠다 생각하니 내 빳빳하던 목이 좀 부드러워지고 못난 상처는 새살이 돋으려는지 간질거립니다. 이제부터 나에게 예쁜 옷도 입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이고, 좋은 경치도 구경시켜줘야겠습니다. 강하지 않으면서 강한 척, 힘들면서 아닌 척 힘들게 살고 있는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차가운 바람입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익숙해지지 않는 바람입니다. 뒹구는 낙엽과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니 내 마음을 보는 듯합니다. 나의 체온은 한겨울 바깥 온도보다 더 차가운 영하 몇 십도 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람이 붑니다. 아주 오래 전에 불기 시작한 따뜻한 바람이 이제야 내 가슴으로 불어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님은 내게도 따뜻한 가슴이 있고, 내밀 수 있는 손이 있으며 수녀님이 사랑한 그들을 위해 기도할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사랑은 늘 내 가까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이제껏 그것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이 붑니다. 살랑 살랑 바람이 붑니다. 나비가 팔랑 팔랑 날아다니고 꽃들이 곳곳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냅니다. 나는 지금 꽃보다 나비보다 먼저 봄바람이 났습니다. 꽃구경도, 꽃노래도 나를 유혹하지 못합니다. 나를 설레게 하고 나를 눈멀게 한 그 사람은 어제는 별을 사랑한 윤동주 시인이었고, 오늘은 적장을 품고 강으로 몸을 던진 논개이고 내일은 또 누구일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내게 해주는 그들의 이야기가 꽃구경, 꽃노래보다 백배 천배 더 좋습니다. 그들이 나를 부르면 나는 가끔 밥 먹는 것도 깜빡합니다. 이보다 더한 봄바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일이 내게 배고픔을 잊게 한다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말입니다.

 책은 자꾸만 나를 궁금하게 합니다. 다른 어떤 남자도 안 되며 오직 한 임금님만 바라보고 살아야하는 조선시대 궁녀들의 삶이 궁금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들이 나라를 찾기 위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70년대 여공들이 어떤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미국의 흑인들이, 이민 간 우리교포들이 어떤 인종차별을 당하며 살고 있는지, 중세 이탈리아의 신부들이 신앙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일본과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는 아직 미국이나 이탈리아, 일본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모르는 그 나라에서 내 나라처럼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몇 백 년 전 또는 몇 천 년 후의 여행도 가능합니다. 그곳엔 나를 사랑해주는 착한 언니도 있고, 다정한 오빠도 있으며, 귀여운 동생과 우리 부모님을 닮은 수많은 엄마 아빠가 계시니까요. 그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아 많이 아팠고 때론 너무 슬퍼서 울었으며 가끔은 기뻐서 웃었습니다.

내 삶은 단지 나만의 삶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내 삶 속에 내가 모르고 있던, 내가 알아야 할 삶도 있고 내가 기억해야 할 삶도 있다는 것을. 지금 나를 지나간 바람이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사라지지만 없어진 것이 아니듯 그 많은 사람들의 삶은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또 다른 바람으로 책 속에서 오늘도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책 속의 그들과 그들을 찾아낸 작가들에게 감사합니다. 바람이 붑니다. 지나온 바람이고 지나갈 바람입니다. 바람에 묻어온 수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오늘 내일도 읽을 것입니다.

 책은 나에게 바람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나를 설레게 하는 봄바람이고, 내가 힘들 때 친구처럼 나를 위로해주고 쓰다듬어주며 격려와 칭찬이 필요할 때 금방 달려와 등 두드려 주는 가을바람입니다. 겨울바람은 나를 자꾸만 이불 속의 따뜻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그 따뜻함에 감사하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사랑과 평화가 함께하길.그리고 내가 알지 못 하지만 책 속에서 만난 수많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람들이 행복하길 빕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덥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잘못으로 시작된 지구온난화 때문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들 더위에 지치고 삶의 무게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제 이것저것 걱정들을 내려놓고 나를 시원한 곳으로 데려가 편하게 잠재울 수 있는 여름바람을 찾아 떠나보렵니다. 벌써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가 보입니다. 저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