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한 줌 노혜숙
느릿느릿 짠지를 꺼내 담던 할머니가 한 말씀 던지신다. “내 짠지는 절대 안 물러.”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던 할아버지가 재쳐 거든다. “암만, 먹어 보면 알지.” 대접에 투박하게 썬 짠지가 담겨 있다. 길가의 흩날리던 벚꽃이 고명처럼 얹혀 있다. 손가락으로 하나를 건져 먹는다. 아작아작 씹히는 느낌이 좋다. 간이 세다. 절대 무를 일 없다는 할머니의 말은 믿어도 좋겠다. 노점 장사 수십 년, 할머니의 얼굴은 제 색을 잃은 지 오래다. 땡볕과 눈보라를 버텨내며 검붉게 굳은살이 박인 얼굴, 옹이 같은 생의 흔적이 역력하다. 허리 휘고 뼈마디 성한 데 없는 몸이지만 눈가엔 소싯적 고운 기색이 남아 있다. 그에 비하면 할아버지 얼굴은 희멀끔한 편이다. 이 서 말 가진 홀아비로 보이지 않는다. 과묵해 뵈는 할머니에게 말을 거는 쪽도 할아버지다. 자분자분 건네는 말꼬리가 살갑다. 두 분은 어떤 사이일까. 오며가며 두 분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다. 어느 궂은 날 비설거지를 거들던 할아버지를 본 적도 있다. 오늘은 꽤 다정해 보인다. 검붉던 할머니 얼굴에 감돌던 홍조는 단지 술기운 탓이었을까.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내 모습에 말을 거들던 할아버지의 살뜰한 표정은 그저 단순한 영감님의 조바심 같지 않다. 신호가 바뀌는 시간은 삼 분 남짓. 무심결에 주고받는 두 분의 말을 엿듣다 신호를 놓친다. 나 때문에 끊어졌던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진다. 할아버지는 줄곧 할머니의 안색을 살피는 눈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잔을 받아 기울일 뿐 별 대꾸가 없다. 안달이 난 할아버지의 말이 길어진다. 보일 듯 말 듯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스친다. 그제야 할아버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술잔을 비운다. 칠순 훌쩍 넘게 옹이 진 세월을 살아온 여인의 마음을 여는 일이 쉽지는 않을 테다. ‘눈 흘길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일찌감치 혼자 된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할머니 역시 이 무슨 남세스러운 일이냐고 물리치면서도 수시로 찾아와 말을 걸어주는 할아버지가 싫지 않았을 것이다. 여자 남자의 경계를 진작 넘어서버린 나이, 뜨겁고 달달하지 않으면 어떤가. 데일 것 없는 덤덤한 마음에 스미는 온기가 나쁘지 않다. 꽃 피는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그늘의 깊이 어루만지며 볕이 되어주는 관계, 아버지의 마음도 저와 같았을지 모른다.
“엄마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구 할머니를 드나들게 하세요.” 아버지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쉰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알았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종종 마실을 오던 이웃집 할머니였다. 영감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칠순을 훌쩍 넘기셨지만 꽤나 곱상한 얼굴을 가진 분이었다. 동병상련의 처지인지라 허물없이 위로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역시 이웃집 할머니의 살가운 위로가 싫지 않으셨을 것이다. 철없는 자식은 제 슬픔이 더 커서 병든 몸으로 아내를 먼저 보낸 아버지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 안 계신 집에 할머니가 드나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상했다. 아버지는 지은 죄도 없이 자식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늘진 뒷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일체 외출을 하지 않으셨다. 가끔 베란다에 나와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는 게 전부였다. 할머니는 더 이상 걸음을 하지 않았고 텔레비전이 아버지의 유일한 벗이 되었다. 아들은 무심한 데다 바빴고, 딸들은 제 편할 때 왔다 훌쩍 가고 나면 그만이었다. 아버지는 아내 잃은 상실감을 끌어안고 홀로 병든 몸을 추슬렀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건네는 막걸리 한 잔에 노점상 할머니가 신산한 세월의 옹이를 풀어내듯, 아버지에게 이웃집 할머니의 따뜻한 위로는 한 줌 햇볕 같은 것이었으리라. 절실함과 진심이 만나는 자리에 무슨 윤리의 냉혹한 잣대를 들이댄단 말인가. 홀로 된 노부(老父)의 적막에 위로는커녕 한 줌 햇볕조차 차단해버리다니. 아버지는 예민한 자식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한마디 변명도 달지 않으셨다. 아버지 가슴에 박았던 대못은 시퍼런 멍이 되어 내 가슴에 남았다.
사거리 할머니의 좌판엔 봄이 무르익고, 위로처럼 꽃잎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두 번이나 푸른 신호를 놓친 뒤에야 겨우 길을 건넜다. - 수필과비평 2018년 6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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