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연鳶 / 오순자

희라킴 2018. 11. 7. 11:03



연鳶

                                           

 

                                                                                                                                          오순자

 

 웅크린 땅에 내려앉은 회색 하늘을 가르고, 몸을 뒤채이며 힘차게 솟아오르는 연을 보고 있으면 긴장감으로 정신이 번쩍 든다. 더욱이 펄럭이는 연 위에 부서지는 겨울 햇살은 유년의 환희로 나를 유도한다.

 

 어린 시절에 연을 날리는 것은 겨울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중요한 놀이여서 정초가 가까워지면 연 날릴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처럼 튼튼한 실이 없었으므로 굵은 무명실에 사금파리를 갈아서 풀로 개어 여러 번 바르면 꽤 질긴 연줄이 되었다. 대나무 얼개 위에 창호지를 여러 겹 바른 다음에 그림을 그리고 꼬리를 달면 연이 완성된다. 연을 날리기 위해서 언덕으로 뛰어 가던 때의 설렘을 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실을 조금씩 풀며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 실이 팽팽해지면서 연이 뜨기 시작한다. 재빨리 얼레를 돌려 실을 풀어 하늘로 오르게 한다. 연이 바람에 실리게 되면 그것이 요구하는 대로 실을 감거나 풀면서 바람의 방향을 따라 이동한다. 연이 일단 하늘에 떠오르면 나와 겨루는 맞수가 된다. 줄을 통해 팽팽한 긴장감이 손아귀에 전달되면, 나는 적군으로부터 선전포고를 받은 병사가 된다. 연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날고 싶어 필사적으로 줄을 당긴다. 연의 적의가 강해질수록 나의 투지도 더 해져서 바람을 이용하여 탈출의지를 꺾으려고 애 쓰다보면 나도 연의 다른 한 끝이 되어 광활한 하늘에 떠오르는 듯하다. 그것은 드디어 줄을 끊고 긴 머리를 날리며 무한한 공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미국에 와서 첫 겨울을 뉴욕의 맨해튼에서 맞는다. 겨울이 되니, 바람이 거세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발목 높이로 쌓여서 그 위를 걷노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허드슨 강변으로 간다. 강물은 회갈색으로 출렁이며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생명들에게 위안의 속삭임을 들려주는 듯 작은 물거품을 내며 천천히 흘러간다. 눈 속까지 파고드는 바람과도 악수하고 서있으면, 불안정하고 메마른 마음의 뿌리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때 커다란 은행나무의 잔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고 있는 연이 보인다. 갑자기 하늘로 날아갔던 연이 마음에 떠오르며 반가움과 애처로움이 교차한다. 줄을 끊어 버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지쳐서 나뭇가지를 붙들고 바람에 몸을 부서뜨리고 있는 연은 알았을까? 자유롭기 위해서 그처럼 맹렬하게 줄을 끊어 버린 것이 무한한 자유가 아니고 파멸의 길이었음을.

 

 사람도 자유롭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원本願에 깊이 박혀 있는 속성이리라. 이브가 선악과를 딴 것이 사탄의 꼬임이라기보다, 신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자라서 성숙한 것이리라.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라는 직물의 한 올로 존재한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의 관계가 교차할 때마다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교육받으면서 다음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삶의 직물을 짜낸다. 그러나 잘 교직된 짜임은 성공적인 삶과 숨 막히는 속박의 이율배반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다. 질서에 길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에 억제될 수밖에 없는 자유 의지는 햇빛과 그늘처럼 늘 함께 하면서 분출의 통로를 찾게 된다.

 

 인간의 최고 이상이 조화된 인격자로 사회 구조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는데 있지만, 이것이 자신의 근원적인 욕구와 상관없는 허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때때로 다른 사람으로 변모하는 것을 꿈꾼다. 지킬 박사가 하이드가 되어 야수로 살아보고, 일생을 고매한 학자로 존경받던 파우스트 박사가 가치 없이 여겼던 삶을 살기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다. 그들이 그 정도로 절박했던 것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도 피할 수 없는 사회의 규범이라는 그물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구속된 삶에 대한 항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하늘에 떠있는 연이 줄에 매어있는 제한된 자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줄을 끊는 순간에 무한한 자유의 길이 아니고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인간도 다른 사람들과의 균형 잡힌 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유를 추구할 때에 외로운 방랑을 시작하며, 혹독한 대가를 치르거나 파멸할 수 있다. 연이 튼튼한 줄에 매여 다른 한 끝에서 당겨주는 힘이 있을 때에 생명을 누릴 수 있듯이, 사람도 절제된 균형 상태에서 제한적이지만 확대되어 가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어찌하랴? 마음 한 끝은 항상 자유의 꿈을 매달고 날며, 외롭고 환상적인 이상을 좇고 있음을. 또한 이것이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보다 나은 그물을 짜는 보이지 않는 손임을. 


 어린 시절부터 하늘에 연을 띄우며 승부가 없는 싸움을 계속했듯, 이제 마음 한 자락을 열고 자유인의 환상을 날리며 창조의 작업을 시작해보고 싶다.

 

 

- 뉴욕 《한국일보》1986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