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골의 스승과 허준
신영복
이 엽서는 고향의 산기슭에서 띄웁니다.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게 하였던 골짜기입니다. 소설 동의보감의 바로 그 얼음골입니다. 깎아지른 병풍절벽으로 둘러싸인 가마볼 계곡에는 이미 어둠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은 스승과 그 앞에 꿇어앉은 제자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바위너덜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소설 속의 유의태와 허준의 이야기는 물론 소설가가 그려낸 상상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나는 허상을 대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사실은 아닐지 모르지만 ‘진실’ 임에는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사실이라는 그릇은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언제나 작고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20년의 징역살이와 7년여의 칩거 후에 가장 먼저 찾아온 곳이 이곳 얼음골이라는 사실이 내게도 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입니다.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권리를 그곳에서는 ‘독보권’이라 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혼자서 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해방감이었습니다. 이제 어머님에 이어 홀로 남아계시던 아버님마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나는 차라리 허전한 마음으로 기차를 타고 무작정 떠나 왔습니다.
오뉴월이 아닌 가마볼 얼음골에는 이미 얼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처절하게 승계하는 현장에서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의 엄정함 하나만으로도 가슴 넘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누군가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배우고 가르치는 이른바 사제의 연쇄를 더듬어 확인하는 일이 곧 자신을 정확하게 통찰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중학교 때던가 나는 이곳에 아버님을 따라온 적이 있습니다. 여든일곱에 440여 쪽의 책을 출간하시고 여든여덟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 생각납니다. 아버님은 그 책에서 사람은 그 부모를 닮기보다 그 시대를 더 많이 닮는다고 하였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와 맨 처음 느낀 것은 사람은 먼저 그 산천을 닮는다는 발견이었습니다. 산의 능선은 물론 나무와 흙빛까지 그토록 친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WTO 체제 이후 한낱 광고 문안으로 왜소화되어버렸지만 어린 시절의 산천이 바로 자신의 정서적 모태가 되고 있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산천과 사람, 스승과 제자의 원융(圓融), 이것이 바로 삶의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둠에 묻혀가는 얼음골 위로 석양을 받아 빛을 발하고 있는 암봉(巖峰)이 문득 허준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스승 유의태의 얼굴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동의보감의 찬술을 명한 왕의 교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약재를 자세하게 적어서 지식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병을 고칠 수도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 글에 나타난 민족의식과 백성들에 대한 애정은 선조 왕의 것이 아니라 허준의 마음이고 허준을 가르친 스승의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의보감의 찬술 자체가 허준의 기획이었고, 허준의 집필이었음이 틀림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동의보감의 완성은 오로지 허준 혼자만의 외로운 작업이었고 그나마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300년 후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이 나오기까지 우리풍토와 체질에 맞는 유일한 의학서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낸 책이었습니다.
나는 얼음골에 쌓이는 어둠 속에 앉아서 한 사람의 허준이 있기까지 그의 성장을 위하여 바쳐진 수많은 사람의 애정과 헌신에 대하여 생각하였습니다. 한 송이의 금빛 국화가 새벽이슬에 맑게 피어나기 위하여 간밤의 무서리가 내리더라는 백거이(白居易)의 시 <국화>가 생각납니다.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던 노신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자기가 무엇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저마다 누군가의 자양이 되는 것을 삶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모(慈母)라 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연쇄 가운데에다 자신을 세우기보다는 한 벌의 패션 의상과 화려한 언술로 자기를 실현하고 또 자기를 숨기려 하는 것이 오늘의 문화입니다. 당신의 장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무수한 상품의 더미와 그 상품들이 만들어내는 미학에 매몰된 채 우리는 다만 껍데기로 만나고 있을 뿐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납니다. 정작 두려운 것은 그러한 껍데기를 양산해내고 있는 삶의 토대와 틀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튿날은 아침 일찍 서둘러 천황산을 올랐습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단풍숲 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혼자서 하는 등반의 가장 좋은 점은 혹시 동행인이 재미 없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입니다. 이른 아침이라 한참동안은 시야에 한 사람도 두지 않고 올라갔습니다. 해발 1000여m의 사자평에 오르자 무연한 갈대평원이었습니다. 햇빛 달빛만 받으며 수천수만 날을 피고 진 갈대꽃이 100여 만평의 드넓은 평원 가득히 펼쳐져 있고 하얀 갈대꽃 위로 스쳐오는 고원의 바람이 먼저 온몸을 씻어 주었습니다.
태백산맥이 남으로 달려와 마지막으로 솟은 산이 천황산입니다. 그 정상에 웅거하고 있는 사자바위가 바다 건너 일본 천황궁을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으로서는 매우 언짢은 일이 아닐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나라 산천 곳곳에 쇠말뚝을 꽂아 단혈을 자행했던 일본으로서는 당연히 ‘천황산’이란 이름으로 바꾸어 그들의 휘하로 거느리고 싶었으리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습니다. 밀양문화원에서는 9월 1일부터 다시 원래의 재약산(載藥山)으로 되돌려놓았습니다. 더구나 허준과 유의태가 사제관계의 처절한 절정에 도달한 얼음골의 상봉이고 보면 비록 오랜 약초재배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당연한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남대학교의 염무웅 교수는 사자평 고원이 고려 때 초적의 은거지라는 사실을 기록에 읽었다고 했습니다. 서북쪽은 얼음골의 병풍절벽 위쪽이어서 천혜의 절벽이고 동남쪽은 석남사와 통도사를 안고 있는 신불산과 영취산으로 둘려있어서 가히 초적의 요새가 될 만한 평원이었습니다 염교수 일행과의 만남은 참으로 우연이었습니다. 나는 옥중에서부터 염무웅 교수의 평론을 애독해 왔습니다만 일면식이 없었던 까닭에 수미봉 기슭에 이르기까지 아마 서너 번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가벼운 인사를 나누면서도 서로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수비봉 아래에 다리쉼을 하고 있던 염교수 일행이 지팡이 하나로 혼자 지나가는 이미 구면(?)이 된 나를 아마 측은하게 보았던지 점심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산 길은 진불암을 거쳐 표충사 뒤편으로 내려왔습니다.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충훈을 기리는 사찰입니다. 그러나 화려한 단청이 사명대사의 풍모와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더구나 사자평 갈대 바람으로 온몸을 씻은 감회를 좀더 오래 아끼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충무공을 비롯하여 곽재우 김덕령 등 절세의 용재들마저 터무니없는 역모를 쓰고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당파싸움의 와중에서도 사명대사는 명리를 뜬구름으로 여기며 지팡이 하나로 돌아간 산승이었습니다.
고매한 도덕적 언어들이 수천억 원의 부정한 축재로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 위선의 계절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가르치고 무엇으로 배우는가 하는 생각이 얼음골의 차가운 교훈으로 남습니다. 알튀세르는 연극이란 새로운 관객의 생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관람을 완성하기 위해, 삶 속에서 완성하기 위해, 그 미완성의 의미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배우의 생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대 위를 걷든, 객석에 앉아 있든, 어차피 삶의 현장으로 돌아와 저마다 그 미완성의 의미를, 그 침묵과 담론의 완성을 천착해가는 사람들 속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화사한 언어의 요설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의 앞뒤 좌우에 우리와 함께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으로써 깨닫고, 삶으로써 가르칠 뿐이라 믿습니다. 여느 해보다 청명하고 길었던 가을이 끝나고 있습니다. 등 뒤에 겨울을 데리고 있어서 가을을 즐기지 못한다던 당신의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 신영복의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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