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나비
김병권
추억의 진미를 맛보려면 먼저 나이를 먹어야 한다'는 릴케의 말과 같이, 내 나이 벌써 이순 고개를 넘고 보니 지나온 날들에 대한 갖가지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가슴속에서 회억의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나는 아득한 세월의 강 저 너머로 홍안의 젊은 시절을 곧잘 떠올린다.
그 누구인들 가슴 아린 추억거리가 한두 가지쯤 없을까마는 참으로 삶과 죽음의 구획마저 가늠할 수 없었던 전쟁 마당에서의 회억만큼은 절실하지 못하리라.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야기된 6·25 전란이 한창일 때 나는 금강산이 내려다보이는 동부전선 최전방 고지에서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아무리 무쇠처럼 단단한 젊은 시절이라고 하지만 몇 날 몇 밤을 공방 전투로 시달리고 나면 그야말로 온몸이 녹초가 되어 아무 데서나 곯아떨어진다.
1952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간밤의 격전으로 피로에 지친 나는 잠시 참호 속에서 낮잠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냥 졸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리라. 그런데 갑자기 고막을 찢는 기관총 소리가 들리더니 뒤미처 소대원 한 사람이 전사했다는 무전 보고가 왔다. 정말 눈깜짝 하는 사이의 일이었다.
전쟁 마당에서야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날따라, 아니 오늘날까지도 내 마음을 애절하게 에이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그 병사야말로 절절한 심혼의 감동으로 시를 쓴 시인이며, 마지막 선혈을 녹여 시어(詩語)를 뿜어낸 격정의 시인이기 때문이다.
먼 남쪽 지방에는 이미 온갖 백화가 만발했을 때이건만 38선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전선 고지에는 아직 을씨년스러운 냉기가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더구나 응달진 골짜기에는 백설기 같은 흰눈이 덕지덕지 쌓여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듯 한랭기온이 가시지 않은 살벌한 고지에 노랑나비 한 쌍이 찾아온 것이다. 졸린 눈을 간신히 뜬 채 적진을 경계하고 있던 L병사는 "아! 저 나비!" 하면서 상체를 일으키는 순간 적의 총탄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 당시의 적들은 고도로 숙련된 저격수들을 곳곳에 배치해 놓고 있어 우리의 허점이 조금만 노출돼도 영락없이 공격해 오는 장기를 가지고 있었다.
찰나적인 순간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너무나도 철없는 병사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싸움 한번 제대로 못 하고 그놈의 나비 때문에 죽다니….'
사방에서 힐난 섞인 애곡의 넋두리가 들려왔다. 나 역시 '바보 같은 녀석…'을 연거푸 뇌이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다가 한참 후 그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니 그 병사야말로 누구보다 시심(詩心)이 풍부했던 문학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비의 전생은 번데기인데 그는 한여름 내내 지친 몸을 추스려 고치 속에서 안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안식이 아무리 안락무량하다 하더라도 하늘을 마음대로 나는 자유에는 비기지 못하리라.
불현듯 자유가 그리워진 그 병사는 전쟁놀음에 미친 인간들을 비웃으며 저 나비들에 이끌려 애틋한 향수의 나라로 줄달음질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육군신문에 응모한 전투수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 '아! 저 나비!'를 남기고 간 그 병사를 회상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찍이 영국의 시인 사무엘 존슨이 말한 것처럼 '시의 본질은 발견'이라는 명구가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기치 못한 발견을 통해 새로운 경이와 환희를 맛본 것이다.
그렇다. 그 병사는 산새마저 피신해버린 황량한 전야에 평화의 여신인 양 노랑나비 한 쌍이 너울거리는 것을 보는 순간 자신 속에 내재한 뜨거운 감동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 감동의 골짜기에 침잠한 아련한 추억을 회상한 것이다.
동구 밖 자드락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개나리며 앞산과 뒷동산을 온통 붉게 물들인 진달래가 흐드러질 무렵이면, 뒤꼍 장다리 밭에도 틀림없이 나비 떼가 몰려왔을 것이다. 그 장다리 밭 사이를 헤집고 옆집 순이와 나비를 잡던 추억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이다. 따라서 그 병사의 망막에 비친 한 쌍의 노랑나비는 단순한 나비가 아니라 바로 그 순이의 얼굴이 오버랩된 환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듯 뜨거운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정열과 또 나비에 얽힌 수줍은 사연을 반추해 보고 싶은 그 마음 바탕이야말로 바로 영혼의 불꽃으로 달구어내는 시심(詩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봄이 물러가는 5월의 길목에 서면 나는 곧잘 그때의 상념들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 저 나비!' 이 외마디 서사시(?)는 40여 년의 시공을 격(隔)한 지금까지도 내 가슴 속에서 짜릿한 감동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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