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록(渡江錄)
강호형
몇 해 전, 대만 여행 중에 들른 야외 온천욕장 한편에 널찍한 수영장이 있었다. 그날따라 손님이라고는 우리 일행 10여 명뿐이라, 한강 가에서 자라면서 익힌 수영 실력만 믿고 자랑삼아 뛰어들었는데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놀았다. 체면만 구기고 나와 벤치에 앉아 헤아려보니 수영을 해 본 기억이 까마득했다.
나는 몇 번 물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 일이 있다. 동네 웅덩이에서 겨우 개헤엄을 익혀가던 열 살 전후였을 것이다. 내 몸뚱이가 물에 뜨는 것이 신기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내가 스스로 대견해서 여름방학 내내 아침밥만 먹으면 아이들이 미역 감는 웅덩이로 달려 나가곤 했다.
밤새 장대비가 내린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숟가락을 놓기가 무섭게 달려가 보니 아이들은 아직 하나도 안 나오고, 밤새 불어난 북정물만 빙빙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대뜸 옷을 벗어던지고,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덤비듯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물의 감촉부터 평소와 달리 싸늘하다 싶더니, 내 딴에는 열심히 헤엄을 치는데도 몸이 소용돌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배가 맹꽁이처럼 부풀도록 물을 먹어가며 죽을 힘을 다한 끝에 맞은편 둑에 간신히 턱을 걸치고는 한 동안 기절했다가 깨어나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 6학년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났다. 가을에 서울은 수복이 됐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해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중학교 입학 연합고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도 전쟁 통에 엄마를 잃는 등 집안 형편이 급격히 나빠져서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서울에 가기만 하면 고학이라도 할 수가 있을 것 같았지만 강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한강 이북으로 가려면 관할 행정기관에서 발행하는 도강증(渡江證)이라는 것이 있어야 할 때였던 것이다. 학생은 학생증만으로 도강이 허락됐지만 나는 중학교 진학을 못했기 때문에 학생증도 없었다.
하릴없이 농사일을 도우며 한 해를 보내다가, 얼마간의 돈만 있으면 밀 도강을 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동생까지 데리고 수리조합 공사장 일을 하는 등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모은 돈을 다 바치고 군용트럭의 솔가지단 속에 숨어 강을 건너고 나서 생각하니 그동안 놀이 삼아 수영으로도 건너던 강을 돈을 주고 건넌 것이 여간 억울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렇게라도 강을 건넌 것이 내 인생 행로의 갈림길이 된 것만은 분명하지만, 밀 도강까지 해가며 멋모르고 뛰어든 세파가 장마물살보다 사나웠다.
그렇게 사는 동안 나도 아비가 되었다. 두 아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어느 해 여름, 한강에 데리고 가서 물놀이를 하는데 부슬비가 내렸다. 사람들이 모두 모래사장으로 나오고 나도 천막으로 들어와 앉으려는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물에 빠졌어요!”
머릿속에 번개 치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 하나 없는 물 한가운데서 딸아이 혼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용수철 튀듯 뛰어 들어 아이의 팔뚝을 잡아끌고, 까마득해 보이는 모래사장을 향해 헤엄을 치려니 다급하게 뛰어드는 동안에 체력이 이미 소진되어 몸뚱이가 자꾸 가라앉았다. 몇 번이고 탐방구리를 하다가 발이 강바닥에 닿으면 차고 올라 아이의 머리를 물 밖으로 떠받치는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마침 지나던 나룻배가 다가와 구조해 주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그 사고 이후로는 수영을 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아이가 벌써 40대가 됐으니….
문득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화제를 모았던 수영선수가 생각났다. 시드니 아쿠아틱 센터에서 수영 자유형 100m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는 세 명이 출전했는데 두 명의 선수가 부정출발로 실격되는 바람에 흑인 선수 혼자 레이스를 펼치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적도기니’라는 나라에서 온 에릭 무삼바니 선수라고 했다. 적도기니는 인구가 5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로 수영장이라고는 호텔에 딸린, 길이 20m규모의 레저용 풀 두 곳이 전부라, 국제규격을 갖춘 50m 정규 레인에는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선수지만, 국제수영연맹의 수영 보급을 위한 특별 초청으로 참가하게 됐다고 했다.
1만 5천 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발 신호가 울리고 무삼바니가 힘차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좀 느리기는 해도 그런대로 무난히 반환점을 도는가 싶더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이제는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져 탈진한 사람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던 관중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와 함성으로 응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응원 속에 초죽음이 되어 경기를 마치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무삼바니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선수들은 메달을 따려고 물살을 갈랐지만 나는 빠져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헤엄쳤습니다.”
영점 몇 초를 다투는 경기에서 그의 기록은 1분 52초대로 이 대회 우승자의 기록 48초대의 두 배를 훨씬 넘었지만 관중들은 그를 시드니의 영웅으로 치켜세웠었다.
밀 도강으로 거친 세파에 뛰어든 이래 세월이 많이도 흘렀다. 그러고 보니 나도 물살 거센 그 세월의 강을 오로지 빠져죽지 않으려고 허우적대며 건너온 것만 같아.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새삼 감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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