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김창식
골목 끝에 이르자 잿빛 건물이 보인다.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 선 복도에 인적은 없고 찬 기운이 와 닿는다. 좌우로 늘어선 방들의 모양과 크기가 엇비슷하다. 가까운 곳 손에 잡히는 방문을 당겨보지만 잠겨 있다. 방향을 바꿔 옆길로 들어서니 벽이 나타난다. 벽과 벽 사이로 통로가 펼쳐져 있다. 걸음을 옮기자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요즘 자주 꾸는 꿈을 간추려 본 것이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아무래도 얼마 전 낭패를 본 때문인 모양이다.
지인과 만날 장소로 정한 곳은 일산 백석역 8블록에 위치한 커피숍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고 두어 번 와본 경험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다. 구획정리가 된 신시가지 지역이어서인지 반듯하게 뻗은 도로를 따라 그만그만한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다. 제과점, 세탁소, 약국, 편의점, 헤어숍, 공인중개사무소…. 옆길로 들어서니 비슷한 간판들이 시침을 떼고 나타난다.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을 더듬어 내려간다. 역시 앞에서 본 풍경이 되풀이 된다.
길을 잃었으면 큰길을 찾거나 오던 길을 되짚어야 한다. 출발한 곳을 찾으려 해도 그 또한 쉽지 않다. 허공에 걸린 도로표지판을 올려다본다. 흰돌마을, 강선마을, 테크노 밸리, 얄미 공원…. 다른 이정표를 보아도 같은 지명들이 방향만 바꾸어 이리저리 뻗어 있어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상한 것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보아도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곳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여자 아이는 수상한 사람을 대하듯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레고 블록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거리를 걷는 느낌이다.
유년의 기억을 비집고 쥐 한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쥐가 나아가자 작은 널빤지 벽이 나타난다. 생쥐가 다른 길로 접어드니 또 벽이 가로 막는다. 쥐가 방향을 바꾸자 또 다른 방해물이 나타난다. 작은 동물은 어찌어찌 해 출구 쪽으로 향한다.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쥐가 방향을 틀어 출구로부터 멀어지더니 다른 곳을 더듬는다. 상황은 되풀이 된다.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널빤지 벽이…. 쥐 한 마리가 기어가자 또 다른 벽이…. 가엾은 동물은 출구로부터 멀어지더니 또다시 다른 곳을 헤맨다.
우리의 삶 또한 미로를 헤매는 실험용 쥐의 운명과 같은 면이 있지 않을까? 누구든 출구에 닿으려 노력하지만 실은 미로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어찌어찌해서 출구 가까운 곳에 다다르기도 한다. 그런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아차 하는 순간 출구로부터 멀어져 겉돌 텐데. 헤매기는 마찬가지이고 곳곳에 위험한 벽이 도사리고 있는데. 도대체 출구가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미로의 외곽과 중심은 미로를 구성하는 닮은꼴 요소인가보다.
약속시간이 지났다. 초조함이 체념으로 바뀐다. 전화를 걸어 양해를 구해야겠다. 휴대폰을 꺼내며 건물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가만, 거짓말처럼 찾던 커피숍 간판이 눈에 띈다. 일시에 맥이 풀린다. 알고 보니 낯익은 건물이다. 그 주변을 몇 차례 왕복했었으니까. 나는 약속 장소가 있던 바로 그 건물 뒤쪽을 헤맸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로의 중심과 출구는 잇닿아 있는 것이란 말인가? 동전의 앞면과 뒷면, 밤과 낮, 삶과 죽음이 그러하듯.
익숙한 곳에서 길을 잃고 미로에 들어선 듯 의아해하는 경험이 늘 상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보아오던 길과 사물의 윤곽, 거리의 모습이 낯설게 여겨지며 보고 있어도 의미가 금방 와 닿지 않아 곤혹스러워질 때가 있다. 오래 알고 지내는 친인(親人)에게서 문득 생경함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늘 오가던 길을 걸으면서도 간혹 이면도로에 접어든 것처럼 ‘우두커니’가 되었다가 ‘어처구니’가 되곤 한다.
삶의 현장을 촘촘히 짜인 허구의 그물망처럼 느끼며 갈 곳 몰라 하다니! 갈팡질팡 헷갈려 하는 이유를 좀 더 근원적이고 실존적인 물음에서 찾아야할 듯도 하다. 그 연유가 다름 아닌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 여건이 마뜩치 않아서거나, 인간존재의 유한성이나 무근저성(無根底性)과 맞닿아 있는 때문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라면 불가에서 법하듯 피안의 대상은 마음 속 허상에 다름 아니니 오로지 마음을 다스려 이를 극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익숙한 우리네 삶의 실체가 실은 낯설고 혼란스러운 미로를 걷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크레타 섬 미궁(迷宮)에 사는 반인반우(半人半牛)의 미노타우로스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게 복잡하고 불편한 미로의 건축물에 사는 까닭을 묻는 것은 악어에게 왜 흙탕물 늪에 사는지 묻고, 설산(雪山)의 독수리더러는 하늘과 맞닿은 척박한 바위산에 집을 짓는 이유를 묻는 것과 같다. '지금 이곳의 삶'이 우리의 것이듯 더불어 사는 모든 생명체에게는 그가 주인인 영역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소얼굴의 괴인에게는 미로로 얽힌 궁전이야말로 고유한 삶의 터전이요, '존재의 집'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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