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건설문학상 최우수상]
알로에와 탁상시계
장미화
집에 특별한 물건이 두 개 있다. 두 개 다 선물로 받았다. 새 것이 아니다. 주인들과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따뜻한 마음도 한가득 품고 우리에게 왔다.
하나는 낡은 탁상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알로에 화분이다. 탁상시계는 중요한 기능인 알람도 안 되는 20-30년이나 됨직한 오래된 모델이다. 이 시계의 원래 주인은 단칸방에 홀로 사시는 연세 많으신 동네 할머니다.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집에 문제가 생기면 가게에 찾아오시는 단골손님이다. 할머니 집일은 어지간한 건 무료로 해준다. 기껏해야 재료비가 전부다. 남편과 내가 외출을 하고 아들이 가게를 보고 있던 어느 날, 할머니가 오셔서 이사를 가신다고 하셨단다. 당신이 평소 아끼던 시계인데 건전지를 새로 갈아 끼우면 꽤 쓸 만할 거라며 주고 가셨다고 한다. 가슴 먹먹해지는 선물이다.
다른 하나인 알로에 화분 주인은 동네 모텔 사장님이시다. 모텔 건물에 하자가 생기거나 냉난방이 안 될 때 연락이 종종 왔다. 손님 묵는 방에 탈이 나면 오밤중이나 새벽도 없이 전화가 온다. 남편은 자다가도 기꺼이 출장 가서 해결주고 온다. 한 번은 하수구를 뚫은 후 남편이 피부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남편의 팔에 붉은 발진을 본 사장님이 피부병에 알로에를 바르면 좋다고 직접 키우시던 화분을 통째로 주신 것이다. 이렇게 여운 깊은 선물들을 받을 수 있는 건 남편이 건축설비업과 인연을 맺은 덕이라.
남편은 IMF 후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관광회사를 차렸다. 하지만 경기가 워낙 안 좋았던 시기라 얼마 가지 않아 빚만 잔뜩 진 채 문을 닫아야 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남편이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보일러 건축설비이다. 난생 처음 하는 육체일이라 파김치가 되어 들어오는 날이 잦았다. 여기저기 붙여진 흰 파스로 옷을 만들었다. 일을 몇 달 해본 남편은 기술자가 되면 전망이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기술도 배우고 자격증도 3개나 땄다. 기술 배우는 동안은 수입이 적어 생활이 힘들었다. 그래도 희망이 있었기에 견딜 만했다.
일을 시작한 지 5년째 되던 여름. 그날은 둘째 아들 생일이었다. 남편은 일을 빨리 마치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모처럼 온 가족이 외식할 계획에 아이들은 한껏 들떠 저녁시간만 기다렸다. 한데 퇴근 시간 무렵 낯선 전화가 왔다. 남편이 구급차에 실려 가고 있다고 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맥이 풀렸다. 고객 집 2층 난간에서 집수리를 하던 중 말벌들에게 습격을 당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했다. 남편은 두 발의 뼈들이 다 으스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4개월 동안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어야 했다. 퇴원 후에도 2년 정도는 정상 생활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시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에 갇혔다. 아직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대소변을 가리며 병간호를 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고꾸라질 듯 버거운 시간들이었다. 건축설비 길로 들어선 남편을 말리지 못한 게 후회로 밀려왔다.
남편이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 친구 영향이 컸다. 그 친구는 외국계 항공사에 다니다 IMF 때 회사가 철수하는 바람에 일자리를 잃고, 보일러 설비업에 먼저 발을 담그고 있었다. 한데 친구는 몇 년 하지도 않고 이 일을 접었다. 공무원인 아내가 작업이 너무 험하다며 급구 말려 다른 일자리를 찾았다고 했다.
남편이 어느 정도 회복되어 다시 일을 시작했다. 나았다 해도 아직 두 발에 철심이 각 3개씩이나 박힌 채다. 쪼그려 앉거나 무거운 것을 들어도 안 된다. 마음 같아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적극적으로 말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다. 이미 설비가게도 차린 후였고 공구들 마련하는 데 꽤나 많은 돈이 투자 되어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 역시 남편이 퇴원 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이름도 생소한 난치병인 메니에르병을 얻었다. 수시로 심한 어지럼증이 찾아와 일상생활조차 힘들었다. 직장을 다니는 건 언감생심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다른 일을 찾아보라는 말은 늘 입 안에서만 아우성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 온 남편은 매일 아픈 발에 약을 바르고 마사지를 해야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무력감과 초조함이 극에 달해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다.
다행히 시간이 갈수록 약 바르는 횟수가 줄었다. 건축설비 일도 차츰 자리를 잡아 갔다. 남편은 일할 때 심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고 정확하다. 그래서인지 단골손님도 꽤나 많다. 아침마다 일 나가는 남편의 등을 보며 간절히 기도 한다.“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염려와 기도가 깃든 건축설비 일은 우리 가족의 밥이 되고 옷이 되고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학비가 되었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아빠는 4년제 대학까지 나와서 왜 이런 일을 하시냐고 가끔 묻는다. 그럴 때면 너희 아버지는 집을 고치는 의사이시다. 비록 사람들이 기피하는 3D 직업에 속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미국이나 호주 같은 선진국에서는 배관공이나 주택 수리공의 임금이 높은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요즘은 이른 나이에 명예 퇴직하거나, 평균 수명이 길어 은퇴 후에 제2의 직업을 찾아야 하는 사람이 많다. 아빠는 그 일을 일찍 찾아 은퇴 걱정이 없다고 말해준다.
한때는 선택의 여지 없이 계속해야만 했던 건축설비지만, 요즘은 평생 직업으로 이만큼 괜찮은 일도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안전사고에 대한 마음의 짐과는 동거가 필수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데 없듯이 마땅히 감내해야 하는 면이다.
새 건전지를 갈아 끼운 탁상시계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집 안방에서 '재깍 재깍’맡은 소임을 완수하느라 여념이 없다. 알로에는 얼마나 번식력이 좋고 잘 자라는지 지인들에게 분양 해주고도 화분이 세 개로 늘어났다. 가끔 남편의 피부병 치료제로, 나의 미용 팩으로도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탁상시계와 알로에의 숨결은 훈훈한 온기가 되어 일의 보람으로 다가온다. 우리 가족에게 건축설비는 삶의 의미와 희망을 지닌 옹이 하나 박힌 버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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