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의자가 있는 풍경 /사윤수

희라킴 2017. 10. 30. 19:08



의자가 있는 풍경

 

                                                                                                               사 윤 수

                                                                                        (문학마당, 가을호) 

 

  지난 겨울쯤에 문득 의자를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 뒤로 가끔 세상의 의자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고, 때로는 내가 모르고 있던 의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이제 의자에 관한 글을 쓰려고 다잡아 앉자 갑자기 어떤 형태의 의자들이 내 머리 위로 막 드리워져 실바람에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허공에 달려있던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의 의자 모빌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환영 같은 거 말이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사다놓은 국수가 많아서 얼른 국수를 삶아먹어야겠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의자를 삶아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스쳐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질주한 무의식의 비약이었다.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

 

  이 제목은 의자의 사전적 의미와, 사진에 실린 의자 즉 이미지와, 실물 의자를 나란히 전시한 개념 미술가 조셉 코수스의 작품명이다. 매체를 통해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작품은 관객을 향해 진짜 의자는 어느 것이고 그 셋은 어떤 관계인지 마치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철학도 유행한다’는 어느 학자의 말이 얼른 떠올랐다. 이미 개념미술은 선구자인 마르셀 뒤샹의 출현으로 시작됐지만 말이다. 여태껏 미술이란 평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캔버스에 입체적인 재료를 붙이는 정도로 알아온 관객이라면 그 작품을 보고 미술이라는 종교가 갑자기 권위적이고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난해한 경전을 들고 불쑥 나타난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니콜라 드 크레시의 만화 『빙하시대』가운데 “배(腹)가 찼을 때  이론을 만들기란 쉽지.”라며 냠냠거리던 헐크의 중얼거림도 이럴 때 유효할 것이다.

  개념미술의 사전적 의미는 “1960년대 서구에 등장한 현대 미술의 경향으로, 사진 또는 도표로 나타내는 문서 등을 수단으로 종래의 예술에 대한 관념을 외면하고 완성된 작품 자체보다 아이디어나 과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반(反)미술적 제작태도를 가리킨다.”고 나와 있다. 미술이 단순히 외형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는 고정 관념과 기존의 시각예술에서 벗어나 언어와 의미를 분석하고, 지적인 유희를 요구하는 시도는 충분히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니까 미술은 물론이고 사진도 영화도 보는 차원을 넘어 읽는 세계로 확대되었다.

  세 개의 의자 각각에 대해 관객이 모르는 바는 아닐 테지만 그 세 가지가 같은 곳에 동시에 있음으로써 관객은 새삼스레 의자가 낯설고 작품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당황하는 경우가 있겠다. 작가가 노리는 것이 바로 관객의 그 불편함이다. ‘의자’ 대신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얼마든지 대입시켜도 될 것이다.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식탁, 하나 그리고 세 개의 파이프, 하나 그리고 세 개의 꽃병, 시계, 모자…….

  어떤 개념미술 작품은 이해가 안 되어 관객이 희롱을 당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미술기자 이규현은 “개념미술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과 작가의 의도가 전부이기 때문에 설명이 따라야 하는 미술”이라고 한다. 개념미술은 다분히‘개인미술’인가보다. 그러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도 너무 난감하거나 분노할 건 없겠다. 미술이든 철학이든 또 다른 방식으로 유행할 것이고, 개념미술을 선도했던 작가들이 ‘그림을 만드는 것은 관람자이며,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람자 몫이다’고 했으니 말이다. 정의된 의자는 만질 수 없고, 이미지는 믿을 수 없으며, 실물 의자는 언젠가 부서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의자든 간에 자신만의 의자는 자신 속에 오래 간직할 수 있으리라.

 

 

  길가의 벤치 프로젝트

 

  토니 모리슨은 미국 소설가이다. 흑인 여성이고, 명문대학을 졸업하였으며, 대학 교수였다. 소설 <빌러브드>로 퓰리처상을, <재즈> 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길가의 벤치 프로젝트(Bench by the road Project)>는 모리슨이 어느 인터뷰에서, 6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삶을 기억할만한 역사적인 징표나 상징물이 하나도 없음을 아쉬워하며 자신의 소설 <빌러브드>가 그러한 상징적인 역할을 대신하기를 바라는 뜻을 밝히다가 비롯되었다.

“흑인 노예들에 대해서는 현존하여 불러보거나, 없어져서 기억하거나 간에, 혹은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거나 간에, 당신이나 내가 마땅히 찾아갈 곳이 없습니다. 기념물이건, 기념명판이건, 화환이건, 기념 벽이건, 공원이건, 혹은 고층건물의 로비이건, 어떤 형태의 적당한 기념물도 없습니다. 기념물로 300피트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물며 길 가의 작은 벤치마저도 없습니다.”

  이에 토니 모리슨 학회는 ‘길가의 벤치’를 모토로 정하고 1993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크고 작은 종류, 견고한 고정식과 이동식 벤치를 디자인했다. 의자에는 사업의 개요에 대한 설명, 공공의 기억에 남을 만한 장소의 의미와 후원자의 이름을 간단히 새겼다. 그렇게 재작된 벤치는 흑인 노예들이 침묵의 시위를 벌였던 곳, 죽임을 당했던 곳으로 뉴욕 5번가, 세인트루이스, 미시시피 등등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20군데 이상의 장소에 설치되었다. 또한 그 의자를 원하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지 배송이 되는데 의자의 규격과 가격이 정해져 있다.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기념비가 있다. 탑처럼 주로 우뚝 솟은 것이 많을 텐데, 그런 조형물은 대체로 접근이나 만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벤치를, 의자를 기념물로 건립하고 그곳에 앉아도 되는 경우는 처음 본다. 사진으로 본 모리슨의 벤치는 고급스럽고 멋있으며, 든든하고 편해 보인다. 블랙 스틸로 만든 의자는 모진 고난의 세월을 이겨내고 비로소 자유를 이룬 강건한 흑인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 벤치 하나를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여놓는다면 바로 개념미술 작품이 되지 않을까. 거리에 건립된 모리슨의 의자들은 이미 숭고하지만 말이다.

 

 

  소로우의 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월든』가운데 <방문객>편에는 ‘세 개의 의자’가 나온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손님들이 뜻밖에 많이 찾아올 때는 그들을 위해서 세 번째 의자만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대개 서 있음으로 해서 방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소로우는 콩코드 마을 월든 호숫가에 가로 세로 3~4m 정도와 높이가 2m 조금 넘는,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판잣집을 직접 지었다. 그리고 2년간 그곳에서 혼자 살았다. 책 내용을 보면 의자는 이웃으로부터 얻거나 주워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기록한 재산 목록 가운데 ‘의자 세 개’가 있는데 이것이 실제로 의자가 세 개인지 나는 의심스러웠다. 왜냐하면 방 한 칸에 불과한 그토록 작고 좁은 집에 의자를 세 개나 놓을 자리가 있겠으며, 소로우의 성격으로 봐서 의자를 그만큼 놔둘 것 같지 않고, 그의 글로 짐작해 봐도 하나의 의자를 상황에 따라 이름만 달리한 것이 아닐까 싶으며, 무엇보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전면에 가까운 그의 집 내부에는 의자가 하나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산 목록에 적힌 세 개의 의자는 코수스의 의자와 맥락이 그리 멀지 않은, 하나의 의자를 소로우가 낭만적으로 다르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어쨌든 소로우에겐 실물 의자의 개수보다 고독이 더 중요했다. 그가 사는 집은 이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리와 공간상으로는 거의 고립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발적 유배였으며, 그는 고독을 숭배했다. ‘고독만큼이나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했다. 고독은 소외나 두려움의 의미가 아닌 가장 온전한 자신만의 세계이다. 고독은 놋그릇처럼 닦을수록 황금빛이 나고, 먹이를 주어 키운 만큼 주인을 높이 섬긴다. 고독과 사이좋게 지낼 수만 있다면 군중과 어울려 요란하고 상처 받으며 지내는 것보다 인생에서 얻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에게 만약 실물 의자가 없었다면 그는 침대나 밥상을 고독용 의자로 이름 붙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소나무 소파

 

  인조가죽 소파가 있었으나 낡아서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최근에 소나무 소파를 샀는데 따져보니 15년 만에 다시 소파를 산 것 같다. 여러 재질이 있지만 나는 나무 소파가 좋다. 더러, 딱딱해서 불편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걸 모르고 샀겠는가. 나무 소파는 앉은 자세를 바로 잡아주고, 마당 한 쪽의 평상에 올라앉은 것처럼 편안하다.

  소나무 소파에는 소나무 향기가 난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소파에 앉는다. 그것은 내게 어떤 대상과 밤새 헤어졌다가 반갑게 만나 하루를 시작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나의 등을 소파의 등에 대고 쫙 펴면 느낌이 개운하다. 마음이 동하면 잠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도 한다. 때로는 소파에 이상이 없는지 훑어보고 그 매끈한 나뭇결을 두루두루 천천히 어루만져본다. 감촉이 담백하면서도 감미롭다.

  소파를 다시 산 건 거실을 장식하거나 손님을 맞이하고, 단순히 앉거나 몸을 눕히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나는 특별한 ‘장소’가 필요했다. 소나무 소파는 내 독서의 온전한 장소이며 나는 그곳으로 출근한다. 읽는 책의 내용에 따라 소파는 쪽배가 되고, 크루즈호가 되고, 타임머신이 되기도 한다. 가끔 책들이 소파를 점령하지만 책은 털북숭이가 아니니 성가시지 않다. 잠이 올 때 방바닥이나 침대에 눕는 것과 나무 소파에 누워 자는 것은 다르다. 책을 베고 나무 소파에 누우면 이제관의 오수도(午睡圖)처럼 먼 곳의 정자에서 쉬는 듯 심신이 평온하다.

  그동안 텔레비전을 단 한 번도 안 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텔레비전을 거의 안 본지 15년이 넘었다. 소파가 없었던 기간과 같다. 그런데 이제 텔레비전을 봐야할 일이 생겼다. 소파를 샀기 때문에 텔레비전을 보겠다는 말이 아니라 장소의 필요성과,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소파를 산 것이다. 공부 삼아 봐야할 프로가 있는데, 단독 과외를 받는 그 시간에는 나무 소파가 교실 의자가 된다. 군살이 없는 나무 소파는 단정한 모습으로 오롯이 맑은 정신만을 간직한 충복 같다.

  아들마저 멀리 여행을 떠나고 나 혼자 집에 남았다. 며칠 두문불출하며, 샤워를 하고, 알몸으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나날이 낙원이다. 게리 카의 콘트라베이스 연주가 천수관음의 지긋한 손길로 위무한다. 어젯밤에 폭우와 번개가 휘몰아칠 때 나는 창가 의자에 앉아 자연의 행위예술과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했다.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멋있다면 그것은 풀밭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서 회의를 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조선 근대화의 출발을 고종황제가 외국인 사신들을 맞이하면서 좌식에서 입식으로 의자가 필요했던 시점부터라고 다. 어떤 권력자도 의자에게는 순종해야 한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 그는 의자에 얌전히 앉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동(棟) 앞에 벤치가 네 개 있는데 누가 앉아 있는 때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 벤치가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을까 하여 나는 가끔 그곳에 가서 누워 하늘을 보곤 한다.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이정록). 그 의자 하나 내놓기가 참으로 어렵다. 의자가 무엇인지를 조근조근 들려주시는 시인의 어머니도 개념미술가이다. “의자의 이데아는/ 마르고 다정하고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일 것이다” (이영광). 내가 아무리 버려야할 짐이 많고 가난해지더라도 소나무 소파는 꼭 데리고 살리라. 마지막에는 늙은 신의 무릎에 누워 영원히 잠들어도 좋으리라. 19세기 조선의 문장가 홍길주는 일찍이 “형상으로 구하는 것은 있는듯하나 없고, 뜻으로 깨달은 것은 없는듯하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진짜 의자가 어느 것인지 묻지 말라. 우리 삶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모든 것은 의자이다.

 

 


 

* 유사룡(劉士龍)이 쓴 상상의 정원 『오유원기』의 내용을 홍길주가 자신의 책『숙수념』을 저술하는데 도입하였다고 밝힘. - 최식,『조선의 기이한 문장』(글항아리)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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