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결 / 최민자

희라킴 2017. 10. 24. 19:07




                                                                                                                                 최민자


 나는 그녀의 엉덩이에 반했다. 등허리에서 허벅지까지 이르는 미끈하고도 부드러운 곡선에 눈길이 미치자마자 송두리째 마음을 앗겨버렸다. 인체의 선이 이토록 유연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동그랗고 탱탱한 여인의 둔부를 눈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사랑스럽고 기분이 좋아진다. '아름다움은 선善이다.'라고 했던가. 이런 저런 일로 울적했던 마음이 청량한 활기로 밝아지는 느낌이다.  


 그녀의 몸은 보르네오 산 원목으로 만들어졌다. 한 품에 들일만큼 아담한 체구에 따스하이 배어날 듯 연한 빛깔을 띄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한 노인이 오랜 수작업으로 탄생시켰다는 이 여인은 무릎을 꿇고 앉은 다소곳한 모양새다.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이국 노인의 솜씨에 내가 그토록 반한 까닭은 그녀의 살갗에 살아있는 선명한 나뭇결 때문이다.


 나무가 살아낸  시간들이 물결처럼 아롱져 정지되어 있는 나이테, 성글고 배인 시간의 켜가 이루어내는 목리木理가 여체의 선과 만나 이루는 미묘한 조화는 한번쯤 가만히 더듬어보고픈 충동을 일게 한다. 그대로 전시장에 남겨두고는 차마 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결국 내 거처로 옮겨오고 말았다. 나뭇결을 잘 다스린 목공의 솜씨에 기꺼이 쌈짓돈을 덜어내고 만 것이다.


 부드러운 걸레에 가구 닦는 약을 묻혀 여인의 몸을 찬찬히 닦아준다. 굴곡을 따라 살아나는 매끈한 결이 아름답다. 무릇 모든 아름다움이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본디의 결을 잘 다스리는 데 있는 것 같다. 세안을 할 때도 맛사지를 할 때도 살결의 방향에 따라야 하고, 머리카락도 결대로 빗어내려야 반지르르 윤기가 나지 않던가.


 엊그제 한 친구를 만났다. 윗저고리 안에 받쳐입은 호피무늬 셔츠가 눈에 띄어 칭찬했더니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이것 싸구려야, 싼맛에 샀더니 옷이 자꾸만 말아 올려 가네. 옷을 재단 할 때 섬유의 결에 맞추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마름질이 거꾸로 된 것 같아."

 과연 그러했다. 살며시 옷을 훑어 내리니 까슬한 촉감이 손바닥에 닿는다. 몸 쪽으로 쓰다듬으니 그제야 윤이 나고 무늬가 살아난다. 정해진 결을 따라 거스르지 않고 쓰다듬으며 사는 것,  사는 일도 그런 것이 아닐까.


 세상 만사에 결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던 사람이 생각난다. 물에도 바람에도 나무에도 옷감에도 있는 어떤 흐름의 켜 같은 것, 물결, 바람결, 나뭇결, 머릿결, 그리고 숨결..... 삼라만상이 흐름 위에 있고 그 흐름이 만들어내는 무늬가 곧 결이라면 결이란 곧 자연스럽게 형성된  순환 이치順理일 터라는 말이다. 억지로 거스르면 흉하게 뒤틀리고 서둘러 욕심부리면 제 빛을 잃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기였다.


  세상의 파도에 몸을 맡기고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야 할 것인가. 순풍을 따라 노를 저으면 편안하고 순조롭기는 할 것이다. 불필요한 저항을 만나거나 파도에 휩쓸려 길을 잃어 염려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렇지만이다. 맞바람 속에서 파도와 씨름하는 멋진 사나이가 있기에 바다는 더욱 아름답고 거센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중도보수가 있어 세상이 중심을 잡아가는 게 아닐까.


  시댁이 일산에 있는 나는 가끔 근처의 호수공원에 간다. 석양 무렵, 붉은 해를 품어 안은 호수를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어보고 싶어서이다. 너른 호수에 바람이 인다. 수면이 푸르게 일렁이고 물살이 천천히 바람 부는 방향으로 떠밀려 간다. 일사불란한 물의 춤 - 아름답다, 아름답다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왜 그런지 그 물결 한 가운데에 돌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툼벙' 소리를 내며 여릿여릿 퍼져 가는 둥그런 물테, 물무늬가 주는 일순의 긴장과 파격이 잠시 나를 흥분시킨다. 작은 돌멩이 하나가 커다란 물위에 떨어져 이루어내는 색다른 파장, 부딪고 스러지는 두 물살의 대결이 묘한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는다. 파문이 내 마음에도 전해진다. 잔잔하 호수에 돌 던지는 일이야 할 일 없는 심술쟁이의 헤픈 짓거리에 불과할 것이나, 역사도 혁명도 위대한 발명도, 정해진 결을 거슬러 사는 소수의 반란과 모험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바람결을 따라 흘러온 물살이 찰랑거리며 내게 말한다. 큰 물살에 휩쓸려버리는 작은 파문처럼, 지는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하는 삶이 있고, 순리인 줄 알아도 거역할 수 밖에 없는 인생도 있는 법이라고, 조물주가 다스리는 자연의 질서 안에서조차 예상을 벗어나는 이변이 일어날 때도 있지 않더냐하고.


 나무여인의 몸을 결대로 닦다보니 허벅지 근처에 작은 옹이가 눈에 띈다. 나무도 한 때는 느긋하고 밋밋한 삶을 거부하고 거친 소용돌이 속을 휘몰이 바람처럼 살아냈던 것일까. 그런들 어떠하리. 큰 물결 가운데의 작은 물테가 아름답듯, 진정 멋스러운 나뭇결 속에서는 옹이조차도 조화로운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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