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境界에 서서
정태헌
밤이 이슥하건만 눈 붙일 기색들이 보이질 않는다. 손전화로 누구와 통화하며 잡지를 건성으로 넘기는 사람, 맥주를 홀짝이며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이, 영수증을 늘어놓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돈을 헤아리는 자 등 제각각이다. 탁자 위엔 기름진 음식과 술이 놓여 있고, 티브이에선 집값이 터무니없다며 이구동성으로 핏대를 올리고 있다. 하나 아랑곳없이 덕유산 무주구천동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간다.
발코니에 있던 이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얼핏 거무스름한 게 눈에 스친다. 거실에서 새어 나간 불빛에 물체가 눈에 어른거린 게다. 짚이는 데가 있어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간다. 마주친 것은 달빛 속에 우뚝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다. 수관樹冠이 눈높이에 떠 있다. 숙소가 4층이니 나무의 키는 십여 미터는 족히 넘을 듯하다.
이곳에 처음 도착한 땐 주위를 눈여겨볼 겨를이 없었다. 사방은 온통 녹음으로 푸르러 눈은 분별력을 잃고, 골짝을 울리는 매미 소리로 귀는 먹먹하기만 했다. 가져온 짐들을 옮기기 위해 숙소를 오르내리다 보니 그 나무가 차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되는, 나무껍질이 불그죽죽한 나무였다. 그러나 그저 흔한 한 그루 나무이겠거니 하고 별 관심 없이 지나치고 말았다.
석양 무렵, 주변 산책길에 나섰다가 그 나무가 다시 눈에 띄었다. 높이 치솟은 키 때문이었을까. 황톳빛 나무껍질을 따라 윗부분까지 쳐다보게 되었는데 그때야 키가 큰 적송赤松임을 알았다. 둥치가 굳건하고 줄기는 구새 먹은 데가 없이 옹골차며 수형은 당당하고 끌밋했다. 쭉 뻗어 오르다가 윗부분에서 약간 굽었는데 대여섯 개의 장솔가지가 춤을 추듯 넉넉하게 펼쳐져 있었다. 모시 진솔을 입고 한껏 멋 부린 한량 같기도 하고, 쾌자 자락 날리며 너울춤을 추는 풍류객 같기도 했다.
나무의 머리 격인 수관은 키가 훤칠한 헌헌장부가 삿갓을 쓰고 있는 형상이었다. 장솔가지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으며 솔잎들은 서로 나란히 키를 맞춰 하늘을 향했다. 햇빛을 더 많이 받으려 가지들이 욕심부려 다투었다면 저렇게 정제된 형상을 만들어내지는 못하였으리라. 석양에 젖은 그 장솔가지 사이로 박새 두어 마리 춤을 추며 오르내리는 풍경이 한껏 고졸했다. 한참 동안 눈길을 거둘 수가 없으며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깊은 밤, 그 적송의 수관을 발코니에서 다시 마주하고 있다. 아니, 이쪽과 저쪽의 살피에서 양쪽을 번갈아 보고 있다. 건넌방에 있던 다른 일행들이 이쪽 거실로 모여든 모양이다. 다시 거실은 소란스러워진다. 이쪽은 화사하고 밝은 불빛이지만, 저쪽은 푸르스름하고 적요한 달빛이다. 이쪽은 먹이와 놀이가 흥성하지만, 저쪽은 달빛과 안개에 젖어 있는 가년스런 침묵이다. 왠지 오늘 밤은 달빛 속의 침묵 쪽으로 마음이 더 쏠린다. 가장 깊은 감정은 침묵 가운데 있질 않던가. 저 깊은 침묵에 들기 위해 적송은 달안개 속에서 얼마만큼 침잠과 혹독한 다스림이 필요했을까. 범접하기 어려운 결곡한 기운이 수관 주위에 감돈다.
어둠에 적응돼 눈이 차츰 밝아 온다. 달빛 속에서 바라본 적송의 수관은 투명하고 침착하다. 땅에서 고개 들어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애오라지 하늘과 땅, 햇살과 산바람이 빚어낸 향맑은 모습이다. 유장하고 가락진 한 편의 시며, 순결하고 웅숭깊은 한 장의 그림이다. 저 자태는 통렬한 설교보다 현자의 전언 같은 무언의 가르침이다. 적송을 눈 속에 넣고 톺아본다. 나는 적송의 수관을 바라보고 있지만 적송의 눈길은 자신의 마음자리와 뿌리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메마른 시멘트 건물의 좁은 발코니에 위태하게 서 있지만, 적송은 땅속에 뿌리를 서려두고 달빛 속에 도저하게 서 있구나. 뿌리는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주변을 서성대거나 산짐승처럼 거친 숲을 싸다니며 탐욕을 부리는 것을 원치 않았겠지. 햇빛을 등진 채 땅속의 어둠과 진탕 속에서 땅 위의 것들을 받들고 키우기 위해 밤에도 불면으로 뒤척였을 것이고. 뿌리가 어둠 속에서 겪은 고통의 대가가 저 정정한 형상을 만들어 냈으리라.
육신을 추스르고 속뜰을 맑히기 위해 찾아든다는 산골짝에서 정작 만난 것은 서늘하고도 짱짱한 생의 긴장이다. 무엇을 깎아내고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루를 어찌 엮고 일상을 무엇으로 벼리며 생을 어떻게 빗질해야 할 것인지 곰곰 되씹게 한다. 밖으로 한 발짝 내딛지도 안으로 들이밀지도 못하고 발코니에 묵연히 서 있다. 적송과 거실 안과 나 자신을 새삼 번갈아 바라본다. 침묵과 소란스러움, 침잠과 혼란, 투명과 혼탁, 영과 육의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거실에서 왁자한 소리가 잇달아 들려온다. 드디어 의기투합 되었는지 패를 갈라 화투판이 벌어진 모양이다. 빨리 들어와 끼어들지 않고 뭘 하느냐는 독촉이다. 발길이 머뭇거려진다. 난간 밖으로 발길을 옮기자니 턱없는 오만이고, 거실로 들어서자니 오늘따라 왠지 스스럽기만 하다. 어디든 오늘 밤은 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성싶다. 이쪽과 저쪽의 경계엔 달빛만 겹겹이 쌓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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