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화(海棠花)
임만빈
큰길을 벗어나 강구 시장 쪽으로 차를 몰았다. 열어놓은 창문 틈을 통해 대게 찌는 냄새와 생선 비린내가 차 안으로 스며든다. 코는 그 냄새들을 맡더니 금세 제 기능을 잃어버리고 혼란스러워한다. 좁고 굽은 길을 따라 해맞이 공원 쪽으로 달린다. 길 군데 군데 지점에서 파도가 몰려서 바위를 후려친다. 파도가 뭍으로 오르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다.
해맞이 공원 언덕 위에 섰다. 바닷가 쪽으로 펼쳐진 풀숲에는 빨간 해당화 열매가 군데군데 흩어져 해풍에 조금씩 흔들거렸다. 사랑에 목이 메어 뱉어낸 가래의 혈흔처럼 아니 첫날밤을 지내고난 사랑의 흔적처럼 보인다. 꽃이 열매를 맺자면 암 · 수가 합쳐져야 하는 법, 몸속 깊이 간직한 생식의 혼을 벌이나 나비가 서로 혼합시킨 결과물일 것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결국 종족유지의 한 과정이 아니던가. 내 대에서 종(種)이 끝나지 않도록 2세를 만들고, 그들을 키우느라 이를 악물고 용쓰며 살다가, 다시 2세가 2세를 만들도록 암 · 수를 결합시켜주고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 그것이 삶이 아니던가.
해당화 열매가 군락을 이룬 곳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해당화 잎과 열매를 기둥으로 거미줄이 쳐져 있고, 그 한 가운데 수도승처럼 여덟 개의 발을 줄에 걸친 거미가 침묵하며 붙어있다. 거미줄의 한쪽 끝에는 보시(布施)의 참 뜻을 보여 주는 듯이 껍데기만 남은 벌의 시체가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다. 저 벌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왕벌을 위해 혹은 주어진 운명에 사로잡혀 일생동안 일을 하다가, 해당화 꽃들끼리 서로 짝을 맺어 빨간 열매를 맺도록 해주고는, 저 수도승 같은 거미한테 온 몸을 내어주고, 온 몸을 비워 저렇게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벌의 시체를 넘어 바라 본 저 편의 숲에는 아직 분홍색 해당화 꽃이 한 송이 남아있다. 해풍이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옆으로 가린다. 접힌 꽃잎은 짝을 찾는 수줍은 색시의 뺨 같다. 언뜻 아련한 꽃의 향이 바람에 쓸려와 코끝에 스며든다. 누군가 향을 맡고 짝을 찾아주기를 고대하는 듯이 향은 짙다. 짝을 찾지 못하는 한 저 아름다운 색깔과 향은 이룸 없이 소멸되리라. 종족보존을 한다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순간의 쾌락 뒤에는 평생의 삶을 옥죄는 무거움이 뒤따른다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시대부터 알려져 온 사실이 아니던가.
꽃 옆으로는 나무의 등을 타고 오른 칡 줄기의 모습이 보인다. 칡 잎들의 가슴팍에는 샹들리에를 닮은 남색 칡꽃들이 청사초롱 같이 매달려 있다. 한 번씩 해풍에 흔들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신방 앞에 걸어놓은 등불 같다. 칡넝쿨 속은 등잔불을 켜놓은 신방처럼 아늑하고 컴컴하다. 옆에 피어 있는 파랭이 꽃은 신방을 구경하는 구경꾼들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기웃거린다.
언덕 밑으로는 파도가 먼 바다에서 숨차게 달려와 와락 바위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숨 막히게 가슴을 밀착시키고 있다가는 갑자기 서로 밀치며 떨어진다. 알알이 부서진 파도의 포말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져 내린다. 파도는 거품을 만들며 흩어진다. 파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몸을 모아 바위를 끌어안으면서 유혹한다. 바위는 끄덕도 하지 않고 감은 손 뿌리치고 맞댄 가슴 밀어내며 할짝거리는 물방울들을 냉정하게 흩어낸다. “철썩”, 파도는 다시 넘어지며 부서지며 하얀 물거품으로 흩어진다. 그렇지만 언덕 위의 달맞이꽃은 안다. 무정한 듯 보이는 바위도 끊임없는 구애에 굴복해서 자기 몸을 조금씩 깎아 파도와 섞는다는 사실을.
달이 떠야 달맞이꽃은 제 자태를 뽐낸다. 홀쭉한 큰 키의 가련한 모습은 햇살이 한창인 낮에는 우스꽝스러운 듯 어색하다. 노란 달빛이 쏟아질 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새초름하고 야들야들한 몸짓이 얄미울 정도로 아름답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그림 속 기생처럼 간드러지고 나긋나긋해 진다. 파도에 실려 오는 해풍에 떠는 모습은 숫처녀처럼 청초하기까지 하다. 달맞이꽃은 매일 밤 파도와 바위의 사랑의 놀이를 지켜보고 같이 몸을 불태웠었다. 하늘에 높이 떠 오른 달을 가슴에 품고 싶어 밤새 몸을 떨기도 했었다. 별들은 달맞이꽃이 아무리 내숭을 떨어도 그러한 진실을 안다. 온 밤 달을 끌어안으려고 밤을 꼬박 새웠다는 사실을. 아침에 달맞이 꽃잎에 매달려있는 이슬방울은, 사실은 밤새 너무나 애를 태워 흘린 눈물방울이라는 것을.
하늘은 낮에는 해를, 밤에는 달을 품는다. 바다는 낮에는 햇빛, 밤에는 달빛을 품는다. 하늘과 바다는 거울에 비친 듯 닮았지만 상극이다. 수 천리 떨어져 마주 볼 뿐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은 가관이다. 하늘 속 구름이 으르렁거리면 바다의 파도도 으르렁거린다. 하늘이 바람을 만들어 ‘윙윙’ 거리면 바다는 파도를 바위에 부딪쳐 ‘철석’거린다. 그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다가 지치면 화해를 한다. 먼 곳에서는 서로 화해의 서양식 인사를 한다. 얼굴을 맞대서 기다란 수평선을 만든다.
도로 뒤편 언덕 위에서는 풍차가 한없이 손을 흔들고 서있다. 풍차는 사랑하는 자가 고기잡이배를 타고 떠나가던 날을 기억한다.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었다. 높은 자리에 서있는 풍차는 그것을 확실히 알았었다. 저 멀리 수평선 넘어 먼 곳에는 폭풍의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풍차는 고깃배 사람들한테 손사래를 쳤었다. 오늘은 제발 출어하지 말라고. 그러나 포구에 웅크린 아랫마을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보는 만큼 보이지가 않는 것 같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날은 드물다고 출어를 준비했다. 폭풍 전야는 조용하다는 옛말도 잊은 듯도 했다. 결국 사랑하는 자는 고깃배를 타고 떠나갔다. 풍차는 미친 듯이 양팔을 휘둘러 고함쳤어도 그들은 폭풍 쪽으로 점점 다가갔다.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아내의 허연 머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아내가 나를 향하여 풍차처럼 손을 흔드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해당화 꽃잎처럼 서로 짝을 찾아 헤맸던 청춘의 시절, 빨간 해당화 열매를 만들었던 것처럼 사랑의 결실을 만들었던 신혼의 시절,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 부서지듯 사랑에 몸을 불태웠던 열정의 시절, 하늘과 바다같이 간극의 격을 두고 밍밍하게 서로 바라보며 지내던 시절, 폭풍 치는 날의 하늘과 바다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던 시절, 수평선 같은 화해의 선을 만들었던 시절 등이 영화의 필름처럼 눈앞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내한테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해맞이 공원 언덕길을 천천히 같이 걷기 시작했다. 해당화 꽃, 해당화 열매, 달맞이 꽃,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검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 그것들이 만든 풍경과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닷가 쪽으로, 아니 우리들 삶의 수평선을 향하여.
[조선문학] 201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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