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모란꽃과 팔려온 신부/ 손광성

희라킴 2017. 6. 29. 19:11



                                                   모란꽃과 팔려온 신부
 
                                                                                                                                        손광
 
 모란을 일러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하고화중왕花中王이라고도 한다크고 소담스러우면서 여유와 품위를 지녀서이리라앉으면 작약서면 모란이란 말도 있다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쁘다는 뜻이다화려하고 풍만한그래서 어느 오월의 신선한 아침에 보는 삼십대 성장한 여인과 같은 꽃이다.


 <양화소록> 보면 모든 꽃을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 있는데 모란은 2등급으로 분류하고 있다꽃에 등급을 매긴다는 것부터가   말이지만 더구나 2등급에 넣기에는 모란은 아까운 꽃이다꽃에 국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꽃은 어떤 민족과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모란은 가장 중국적이다 크고 넓적함이 그렇고 형태의 화려함이 그러하며 농염한 색채가 그러하다서양 사람들은 장미를 사랑하고일본 사람들은 국화를 사랑하듯이중국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한다모란은 그만큼 중국적이다.


 그 원산지가 또한 중국적이다모란은 수나라 때부터 사랑을 받다가 당나라에 와서 유행했다궁중과 민가에서 다투어 심었는데신라에까지 <모란도> 함께 씨앗이 전해질 정도였으니 짐작이 가고도 남을 일이다.


 아름답고 명민하기로 이름난 선덕여왕이 어렸을   <모란도> 보고꽃은 아름다우나 벌과 나비가 없으니 필경 향기가 없겠구나.  것은  알려진 이야기다한데 모란에는 정말 향기가 없을까아니다있다선덕여왕의 말은 다만 애교 있는 실수였을지도 모르고씨를 심어 꽃이 피었는데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도 또한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향기를 말할 유향幽香이라 함은 난초의 향기를 두고 하는 말이고암향暗香이라 함은 매화의 향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모란의 향기는 이향異香이라 한다향기가 좋으냐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한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시가 많다 가운데 꽃과 여인과 사랑을 노래한 시를 뺀다면 몇이나 남을까그것들은 시의 영원한 소재요 주제다서구에는 장미를 노래한 시가 많다동양에는 모란을 노래한 시가 많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고려  예종은 모란을 애상해서  신하들과 함께  꽃을 읊었고이규보는 우리나라에서 모란을 제일 많이 노래한 사람이다말하자면모란 시인 셈이다. <한림별곡여덟  가운데 꽃을 노래한 것이 다섯 번째 장인데모란이 제일 먼저 나온다.


 조선시대의 시조 600수를 조사해 보았지만모란을 노래한 것은   수밖에 없었다고려시대에 비해 아치와 고절을 숭상한 것이 조선시대이고 보면 시조에 나오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 모를 일이다조선의 선비들은 모란보다 매화와 난을  사랑했다그러나 모란 시로 유명한 것은 역시 이백이었다그의 활달한  정신과 모란의 풍려함이 맞아 떨어진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이었다침향정沈香亭 앞에는 모란이 이슬을 머금은  활짝 피어 있었다난간에 기대앉은 양귀비와  어깨너머에  모란을 번갈아 보고 있던 현종玄宗  아름다움에 취해 있었다명창 이구년 노래를 불렀지만 그러나 흥미를 잃은 뒤였다.


 그래서 황제는 소리쳤다양귀비를 대하여 어찌 낡은 가사를 쓸까 보냐. 하여 즉시 이백을 불러들이게 했다어느 술집에 취해 있다가 창졸간에 잡혀온 그는그러나 거침없이 일필휘지一筆揮之하니세 편의 시가 경각頃刻 이루어졌다그것이 유명한 <청평조사>이다.
 
 어느 것이 귀비이고
 어느 것이 모란인가.
 임금의 입가엔 미소가 넘쳐,
 못다  이사 다시 있으리.
 지금 沈香亭
 한창 봄인 것을.
 
 그러나 봄은 언제나 덧없는  찬란하던 모란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듯이 이백도 양귀비도 모두 비명에 가고 만다.
비극이란 위대한 영웅과 아름다운 미인의 죽음이라고  사람이 있었다우미인虞美人은 초패왕을 위해 자결하고비연飛燕 실연하여 죽고왕소군王昭軍 오랑캐 땅에서 말라 죽고 말았다우리 역사에서 제일가는 미인인 수로부인水路夫人 또한 같은 길을 걸은 것은 아닐까?


 내가 아홉 살쯤 되었을 때였다이웃에 사는 중국 사람이 장가를 들었다신부는 고향인 중국에서 사온다고 했다중국 사람들의 결혼식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던 마을사람들이 모두 몰려들었다나도 누님을 따라 나섰다.


 어른들 틈으로  신부는 매우 예뻤다경극京劇 나오는 배우 같았다머리 장식과 화장이 매우 요란했지만분홍 치파오를 입은  이상한 향내를 풍기면서 무심히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는데옷자락 밑으로 뾰쪽이 내민 신발에는 그녀처럼 화사한 모란꽃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런데 손님을 맞는 신랑은 연신 웃음을 흘렸지만 신부는 조금도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팔려 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어린 나이에도 어쩐지  신부가  안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신부는 오래 살지 못했다결혼식은 초여름이었는데장례식은 늦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모란을  때마다  신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인지 더없이 화려한 꽃이지만 어딘가 낯설어 보이고그리고   없는 슬픔 음영陰影 같은 것이 어려 있는 것만 같다지고 있는 모란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슬픈 일이다사랑하는 사람의 요절을 보는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눈물이 많은 사람은 심지 말아야  꽃인가 한다.


 환도還都 직후였다명동 중국 대사관 골목에는  때만 해도 중국인 신발가게가 많았는데어느 가게에분홍색 공단貢緞 불이 붙듯이 붉은 모란을 수놓은 꽃신  켤레가 제일 위쪽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가끔  앞을 지날 때마다 요절한 신부 생각에 걸음을 멈추곤 했다사고 싶었지만 내게 그만한 돈이 없었다그만한 돈이 있는 지금은 신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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