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산다는 것은 / 맹난자

희라킴 2017. 6. 21. 19:19



산다는 것은 


                                                                                                                             맹난자


 지축이 흔들린다. 서둘러 개표를 하고 지하철 계단으로 내려갔다. 전동차 앞에 초등학생들이 무리 지어 있다. 붉은 악마의 티셔츠를 입은 아이들, 하늘색과 노란색의 티셔츠를 입은 세 그룹이었다.


 재잘거리는 소음 때문에 다음 차를 탈까 하다가 그냥 올랐다. 책을 보기는 틀렸다 싶어 경로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와글'대는 소리가 여름밤의 무논 같다. 별안간 고함치는 아이들의 함성에 놀라 눈을 떴다. 왈칵하고 전동차가 급정거를 하며 심하게 흔들렸다. 바람에 누운 풀잎처럼 작은 몸들이 앞뒤로 쏠린다. 낄낄대면서 아이들은 재미있는 놀이처럼 즐거워한다. 그러면서 금세 중심을 잡아간다.


 서른이 채 안 돼 보이는 여교사들은 능숙하게 아이들을 지휘한다. 청바지 차림의 한 여교사가 검지를 입에 갖다 대자 차내는 금세 조용해졌다. 그애들이 병아리처럼 귀여웁기만 하다.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아이에게 몇 살인가를 물었더니 새침데기처럼 손가락만 여덟 개를 펼쳐 보인다. 또다시 재잘대며 장난치는 아이들,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한다.


 이번에는 어느 짓궂은 녀석이 여자애의 머리를 잡아당겼는지 선생이 갑자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사과하라고 채근한다. 별안간 오른편에 서 있는 남자아이의 얼굴이 버얼개진다. 선생의 독촉은 계속되었고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해져서 그 아이에게서 차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미안해." 잦아드는 목소리. 그 아이의 앞에 갈래머리를 땋은 여자애가 있었다. "어이구, 잘했어"를 연발하며 선생은 얼굴 벌개진 녀석의 등을 계속​ 두드려 준다. 괜히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앞의 광경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는데 서운하게도 그애들은 모두 올림픽공원역에서 내렸다.


 갑자기 전동차 안은 텅 빈 해안가처럼 적막해졌다. 대신 마주앉은 노인들의 모습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한 편의 정물화를 보는 느낌이다. 어깨는 많이 굽었지만 깨끗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샌들에 양말을 신고 돗수 높은 안경을 쓴 노인. 그러고보니 세 분은 모두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 밑으로 눈가에 경련이 이는 할아버지에게 눈이 더 머문다. 볼수록 불편한 떨림, 자신의 의지로도 제어할 수 없는 경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다. 이제야말로 안경이나 지팡이, 의치義齒​같은 보조수단에 기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대로 몸이 따라 주질 않는다.


 땅거미 질 무렵 혼자서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고즈넉하면서도 왠지 낯설지 않은 우수의 엷은 그림자 같은 것들, 어쩔 수 없이 이제 그런 것들을 수용해야 하는 때인가 보다.


 요즘은 혼자가 훨씬 편하게 느껴진다. 남편도 진작부터 그런 눈치였다.


 대체 인간의 몸이란 몇 살까지 이성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든 것은 오십 고개를 슬쩍 넘어서면서부터였다. 가임可姙기간이 끝난 여성들에게는 일본의 해군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출생은 신화 같은 얘기이기도 했다. 여자 나이 56세에 출산을 하다니?


 하지만 남자들의 욕구란 여자와는 다른 것 같다.


 괴테가 19세의 처녀 올리케를 만나 청혼한 것도 그의 나이 75세 때라고 한다. 여자들을 사랑하고 헤어질 때마다 그는 수많은 시를 남겼다. 이웃 나라,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살을 했을 때도 이렇다 할 단서나 뚜렷한 유서가 없었으므로 억측만이 무성했는데 그는 꽃가게의 소녀를 데려와 많은 월급을 주면서도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꽃을 감상하듯 매일 소녀를 바라보며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았다는 것이다. 몸에 와 닿는 눈길을 견디지 못한 그 소녀가 집을 나가 버리자 이를 바관한 가와바타가 자살을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가차없이 변태 성욕자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런데 왜 그때는 몰랐던 것일까?


 헤밍웨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행 도중에 만난 소녀 아드리아나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이탈리아 귀족 집안의 막내딸인 이 18세 소녀를 자신의 큐바 집으로 초대하고 아내를 쫓아내려고까지 마음먹었다니. 그러나 제 또래의 청년과 눈이 맞은 소녀가 그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헤밍웨이는 제 몸의 한 부분이 절단 당하는 아픔을 느꼈노라고 술회했다. 어린애처럼 주저앉아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오래 전 비행기 사고로 성불구자였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 중에 '젊음'만한 것이 다시 있을까? 괴테의 육성이 다시 들려오는 듯 했다.

 사람에게 생기를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야말로 멋진 증거가 아니겠는가

 더는 사랑하지도 방황하지도 않는 자라면

 차라리 죽어 매장되는 것만 못하리.

 그렇다. 생기生氣였다.


 요즘 들어 아이스 댄싱이나 살사춤 같은 TV장면에 채널을 고정시키고 아예 넋을 놓고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가족들의 눈길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와 같은 심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분명 춤부터 배웠으리."

 눈부신 젊음과 아름다운 율동, 시원한 속도감과 게다가 격렬한 열정까지. 거기서부터 나는 이미 멀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일정한 계단을 오르다가 중도에서 멈춰 서야하는 퇴행성관절염보다도 더 쓸쓸한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편 돌이켜 생각하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지금 괴테와 가와바타에게 속으로 사죄하고 있듯, 이렇게 몰랐던 부분을 다시 이해하게 되고 치기 어린 내 속단과 편견들을 시정할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어지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한 가지만 더 털어놓자면 한 때 나는 다섯 자녀를 고아원에 내다 버린 루소를 몹시 미워한 적이 있었다. 그의 뜨거운 참회의 눈물을 알기 이전까지는.


 그 후 산다는 것은 내게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왜 그때는 알지 못했던 것일까?


 이렇게 흔들리는 전동차 안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인화지에 피어나듯 떠오르는 지난 일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반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아버지의 식탁에서 나날이 늘어나던 그 많던 약봉지를 좀더 따뜻한 눈으로 이해해 드리지 못한 것도​ 못내 뉘우쳐진다.


 차에서 내려야 하는데 어떤 날은 코끝이 매워 와 눈을 뜰 수 없는 때도 있었다. 씻겨 내리는 눈물, 가슴속에 화해해야 할 것이 남아 있는 동안은​ 우리에게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피어오르는 상념을 따라 머흘한 구름 속인 듯 나는 전동차에 멍하니 앉아 있기를 자주 한다.


 백의종군이랄까. 변방인의 심정으로 지내고 있는 요즈음, 내 자신이 남루해진 옷만큼이나 편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떤 날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다시 돌아올 출발점을 왜 애써 너는 왕복하고 있는가?


 오늘도 이렇게 흔들리며 가노니 언젠가는 멈추게 될 시간의 파도 위를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별안간 몸이 수평선 너머로 파도쳐 내리듯 앞으로 쏟아지고 만다.


 재잘대던 아이들처럼 몸이 출렁인다. 언젠가 이른 아침 몬트레이에서 시숙을 따라 부둣가에 나갔을 때였다. 통에 쏟아 붓는 정어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확 끼쳐 오던 그 뭉클함, 그리고 허공에서 활처럼 팽팽하게 휘어지던 그 은빛 활어活魚의 곡선. 그렇다. 바로 그런 생기였다. 산다는 것은 생기에 대한 열망, 그 향일向日에 바쳐지는 노정路程에 다름 아닌 것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한 뼘 남짓한 볕바라기. 살아 있음의 이 절실함. 나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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