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앞 은행나무
장미숙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그녀는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 누워 있었다. 몸은 인도에, 다리와 팔은 차도에 걸쳐놓고 그녀는 미동이 없었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놀다 아무렇게나 팽개쳐버린 인형 같았다. 축 늘어진 팔과 다리, 시멘트 바닥과 맞댄 한쪽 얼굴이 창백했다. 벌어진 옷 사이로 깊은 가슴골이 보였다. 말려 올라간 치마 밑으로는 허연 허벅지와 종아리가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었다. 벗겨진 한쪽 신발은 그녀의 발 대신 은행잎을 담고 있었다. 허벅지 위로 레이스 달린 속옷이 보일 듯 말 듯 한데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스레한 아침, 출근 시간에 맞닥뜨린 광경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를 어찌 해야 하나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다행히 경찰들이 도착했다. 여 경찰 두 명도 함께였다. 신고자인 듯 남자 한 명이 옆에서 흐느적대고 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의 걸음걸이가 휘청했다. 혼자 중얼중얼하는 것도 같았다. 경찰은 남자에게 여자의 가슴을 만져보라고 했다. 의식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라 설명했다. 남자는 멈칫하더니 여자의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 남자는 횡설수설했다. 경찰은 대충 알아들었는지 여자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이 힘겹게 여자를 구급차에 태웠다. 그녀가 무거운지 애를 먹었다. 벗겨진 신발을 주워들고 남자도 경찰차에 올랐다. 여자의 옷에 달라붙은 은행잎 몇 개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 현존했던 사건을 모두 보따리에 싸서 데리고 가버리자 흔적은 사라졌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 그곳은 일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망연히 서서 여자가 누워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은행잎이 바닥에 소복이 깔려 있었다. 자신들을 누르고 있던 존재의 무거움이 사라지자 은행잎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은행나무 열매 냄새인지, 술 냄새인지 모를 비릿함이 아침 바람에 섞여 있었다. 위를 올려다봤다. 놀란 나를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깡마른 은행나무가 인간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누워 있을 동안 쭉 지켜봤을 은행나무는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존재였다. 또한, 목격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진술자이기도 했다. 여자가 언제 그곳에 나타났으며 왜 만취 상태로 쓰러졌는지 은행나무는 알 터였다. 쓰러지고 난 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봤을 나무는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여자가 쓰러진 경위에 대해서는 경찰이 조사할 것이며 그들이 판단할 일이다. 그들에게 진실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미비한 곳이 있으면 추측으로 꿰맞출 것이다. 술에 만취한 남녀가 모든 상황을 제대로 기억할 리 없기 때문이다. 여자의 생명에 이상이 없으면 상황은 가볍게 처리될 가능성도 크다. 은행나무는 그런 일에 이골이 난 듯 담담했다.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나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들은 참 이기적이야. 자신들만 생각하지. 아무도 나에겐 관심을 두지 않아.”
순간, 은행나무를 다시 올려다봤다. 이파리에 물기가 반짝였다. 나무의 눈물 같은 것이었을까. 내 눈은 은행나무의 몸피에 꽂혔다. 아! 은행나무의 허리, 구부정하게 휜 허리로 은행나무는 허공을 붙잡고 있었다. 애초 굽은 허리로 태어난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인 힘에 의해 서서히 허리가 굽은 것일까.
술집 앞에 있는 은행나무, 순탄한 삶을 살기에는 애초 그른 운명인지도 모른다. 밤이면 인간들이 몇 겹으로 된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는 곳이 술집 아니던가. 쥐꼬리만큼 남은 자존심이라도 건져볼까 밤의 뒷덜미를 붙잡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 속에서 은행나무인들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까. 낮에는 도시의 소음과 매연에 시달리고, 밤이면 취객들의 횡포에 시달렸을 나무다. 밤이 깊어갈수록 술 냄새는 온몸으로 스며들어 나무의 신경을 톡톡 건드렸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서, 나빠서, 삶이 고달프고 버거워서, 또는 사랑과 이별 때문에 술집을 찾는 사람들이 은행나무 따위에게 신경 쓸 리 없다. 술집은 밤이면 더 환해지며 혼탁한 영혼들에게 달콤한 입술을 내민다. 개개인이 주인공인 삼류 드라마가 술잔에 빠지고 자기도취의 이야기는 다시 술을 부른다. 술잔에서 출렁이는 하루의 삶, 술잔과 함께 흔들리는 위태한 삶이 평화로웠을 리 만무하다.
피곤을 담보로 저당 잡힌 시간과 잉여(剩餘)의 시간이 뒤섞여 채우고 비우며 밤이 더 환해졌을 술집, 하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건 깊은 어둠이다.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 발가벗겨진 인간의 탐욕, 추태와 잔인함, 신파적 사랑과 배신이 피워낸 눈물과 웃음도 지켜봤을 나무다. 은행나무는 때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분을 풀지 못한 사람들이 달려와 주먹질을 해대고 구둣발로 걷어차도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한 나무의 생이 얼마나 아팠으랴. 배신당한 여자의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고,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아줄 수도 없을 때 나무도 밤새 흔들렸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토사물로 악취가 진동해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을 나무. 울분과 통탄이 옹이가 되고, 인내의 시간이 열매가 되고 잎이 되었으리라. 바람과 햇살 맑은 곳에 태어나지 못한 운명이 서러워 저리도 말랐을까. 그런데도 자신의 몸을 탈탈 털어 노란 이불로 쓰러진 여자의 몸을 덮어준 나무였다.
문득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란 동화가 떠올랐다. 소년을 몹시 사랑한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는 소년이 어렸을 때 그늘과 놀이터를 제공해준다. 돈이 필요할 때는 열매를 아낌없이 내준다. 집을 지으려는 소년에게 가지를 주고, 장년이 된 소년에게 배가 필요하자 온몸을 내어준다. 밑동만을 남겨둔 나무, 하지만 그 밑동마저 노인이 된 소년에게 의자로 내어준 나무의 이야기다.
도시의 은행나무는 개인이 아닌 다수를 위한 나무다. 삭막한 도시가 푸른 숨을 쉴 수 있게 해주고, 아름다운 계절을 위해 온몸을 불태운다. 술집 앞 은행나무는 이리저리 치이고, 핍박받아도 손 내밀 곳 없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한다. 힘과 권력, 부와 재력 앞에 고개 숙이고 혼자 울어야 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닮았다. 하지만 세상의 밑절미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힘으로 다져진다. 버틸 수 있는 힘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일 아침이면 은행나무 밑에는 인간이 버린 재활용품과 쓰레기 봉지가 수북할 것이다. 어쩌면 구인, 구직 광고 전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을 위해 쓰일 나무의 생이 고귀하다. 구부러진 나무 허리를 매만지자 화답하듯 은행나무가 수액으로 직조한 노란 엽서 한 장을 내어준다. 나무는 끝까지 따뜻함으로 세상에 제 이름을 조용히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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