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야생화 / 주인석

희라킴 2017. 5. 2. 11:32


야생화

                                                                                   

                                                                                                                                              주인석

 미인은 이러해야 한다. 눈동자가 투명하고 검어야 하며, 아래입술이 도톰하고 얼굴이 작아야 하며, 엉덩이는 둥글고 젖꼭지는 담홍색이어야 하며, 볼이 통통하고, 목덜미와 허리는 가늘어야 한다. 명나라 소설「금병매」를 읽고 미인을 찾아 나섰다가 광야에서 만나야 할 미인을 야생화 전시장에서 만났다. 야생의 미는 거칠지 않았고, 질기지도 않았으며 무례하지도 않았다. 미의 원천은 야생에 있었다. 나는 야생의 미를 하나씩 감상하며 사색의 자유에 빠져 들어갔다.

 야생화는 세미인[細美人]이다. 야생화의 뿌리는 가늘다. 드세지 않아 손으로도 쉽게 뽑을 수 있는 것이 많다. 굵은 뿌리를 박고 고집을 부리지 않으며 어미의 뿌리에 붙어 힘을 기생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쉽게 쓰러지고, 비가 오면 땅바닥에 몸을 붙인다. 그러나 사방이 잠잠하면 소리 없이 일어나고, 햇빛이 나면 비굴하지 않게 꼿꼿이 선다. 선이 가늘되 유연해야 미인인 것이다.

 야생화는 영미인[映美人]이다. 햇빛 아래 야생화 잎은 푸른 투명으로 속내가 훤히 읽힌다. 드러난 잎맥을 수치스러워 하지 않는 당당한 미인이다. 모든 것이 쉬워보이지만 결코 하나도 풀 수 없을 문제 같은 미인, 금방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지만 결코 잡히지 않는 투명한 물같은 미인이다. 그물처럼 얽힌 인간관계도 일편단심 평행선으로 살아온 삶도 누구나 겪어야 할 인생사의 한 맥이라는 것만 보여줄 뿐이다. 뿌리를 뚫고 올라와 세상에 첫잎을 내밀었을 때부터 상처는 엄연한 현실.

 그것이 야생화가 되기 위한 최초의 관문이자 아름다움의 시작이다. 떡잎을 버려야만 투명한 잎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깜깜한 껍질 속에 있는 진실, 그러나 벗기지 않고서도 보여줄 수 있는 진실이 아름답다. 벗은 섹시함보다 비치는 요염함이 있어야 미인인 것이다.

 야생화는 연미인이다. 야생화는 목덜미와 허리가 연약한 미인이다. 그야말로 줄기가 가늘어서 아름답게 보이는 꽃이다. 세상풍파에 거칠어지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가시 하나 없는 몸으로 태어나 지켜낸 수많은 순간순간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속이 강해질 때 , 겉도 강해지면 여걸이 되고 속이 여릴 때, 겉도 여려지면 여종이 된다. 속이 강할수록 겉은 여려보여야만 미인인 것이다. 꺾이지 않는 유연성의 내숭이야말로 줄기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무기가 될 것이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음과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음이 있어야 미인인 것이다.

 야생화는 미미인[微美人]이다.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작은 꽃잎에 있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아야 요요하고 자세히 보아야 요염하다. 화려하고 큼직한 빼어남보다 소박하고 자그마한 아리따움은 누군가의 몸을 굽히고 다가오도록 만든다. 한눈에 쏙 들어오고, 두 팔에 쏙 안길 만큼 몸이 작아야 미인이고 미소가 넘칠 만큼 얼굴이 작아야 미인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미녀라 부르고 동양에서는 미인이라 부르며 서양에서는 유혹한다하고 동양에서는 매혹적이다 하는지 모르겠다. 만날수록 호기심이 생기고 시간이 흐를수록 끌림이 있는 작은 꽃잎이 되어야 미인인 것이다.

 야생화는 유미인이다. 수채화 같기도 하고 파스텔화 같기도 한 야생화의 꽃잎은 색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물에 색을 풀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허공에 색을 문질러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부드럽고 얇은 꽃잎은 파르르 떨리는 성대에서 나오는 자늑자늑한 음성을 지닌 미인의 목젖이다.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꽃씨에서 출발하듯이 미인의 아름다움은 말씨에서 시작된다.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귀에서 울려, 가슴으로 번져나가야 아름답다. 선을 넘지 못하는 도포보다 선을 넘어 번지는 채색감이 매력 있다. 색깔 있는 미인보다 색감 좋은 미인이 진짜 미인인 것이다.

 야생화는 반미인이다. 야생화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다산다복에 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번식한다. 책임 있는 사랑에 익숙한 인간과는 달리 야생화는 사랑에 대하여 책임을 묻지 않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의무를 다한다. 때로는 멀리, 때로는 아주 가깝게 번식을 하면서 사랑에 최선을 다하기에 종의 이별이란 없다. 다만 질투 많고 욕심 많은 인간들의 지나친 야생화사랑으로 야생미인은 사라지고 조형미인만 남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야생미인들의 번식에 해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새끼를 많이 낳으면 복도 많아진다고 했다. 선홍색 젖꼭지에 둥근 엉덩이를 가져야 미인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미인의 조건, 나도 그러한가? 물음표를 그리며 되돌아보다가도 나도 그러고 싶다로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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