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병풍 앞에서 / 유혜자

희라킴 2017. 4. 8. 10:21



병풍 앞에서 


                                                                                                                                         유혜자


 그림에 대한 식견도 없으면서 가끔 친구들과 함께 그림 전시회를 기웃거려 본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 피난 시절, 노환으로 누워 계시던 외종조부께 자주 놀러 갔다. 문 밖에선 겨울 나무가 마구 몸부림치고, 쌓인 눈을 털어 내리는 거센 바람이 문풍지를 울게 해도 키 높은 병풍 옆은 안온해서 좋았다.

 활 쏘는 그림 속에서 화랑도의 세속오계와 풍류를 떠올리고, 효녀 심청이가 나왔다는 연꽃 그림을 보려고 키 높은 병풍 그림 앞에서 발돋움하면, 문 밖에서 낮닭이 홰를 치며 울기도 했다. 원두막에서 참외를 먹다가 떨어뜨려 엎드려 주우려는 꿈에서 깨어나 보면 피리를 불며 내려다보던 신선도神仙圖​.

 할아버지의 머리맡에 펼쳐 있던 병풍의 그림을 다 기억할 수 없어 안타까울 때도 있다. 부여 낙화암의 삼천 궁녀 비사를 배울 때 병풍 가운데쯤 있던 절벽 그림이 생각나고, 수학여행 때 골안개가 자욱한 산 속에서 길이 안 보여 기다릴 때는 병풍 앞에서 귀를 틔고 시야를 넓히고 싶던 욕심을 상기하기도 했다.

 지금 나는 내 앞에 우뚝 솟은 풍악楓岳의 웅장한 그림을 보며 조금 뒤로 물러섰다. 먼 산의 어렴풋이 드러난 능선의 아름다움, 중간 부분에서 앞으로 다가오는 육중한 가슴, 그리고 산기슭에서 붉게 피어난 단풍과 간간이 섞인 소나무의 청청함.

 어느 날이었던가. 오랜만에 할아버지 방에 들러 보니 병풍 몇 폭이 접혀 있고 산을 향한 뒷문쪽이 트여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병상에 오래 계신 할아버지는 창 너머 구름결에 눈을 보내며 무언가 자연에 대한 대화의 운을 틔고 싶으셨나 보다. 그때 문틈으로 뒷산을 내다보니 뒷산 기슭의 나무들이 우우 하고 우는 것 같았다.

 천년이나 산다는 학의 그림을 가까이 보며 그 장수함을 부러워하셨을까? 하얗게 센 이마 위에 숨가쁘게 펄럭이든 등잔불의 그림자, 이불을 포개어 귀까지 덮으시던 할아버지의 귓가에 겨울 나무의 울음은 어떤 의미로 울렸을까?

 동양화, 그 중에서도 산수화는 아무리 현대기법으로 다듬었어도 눈 덮인 산 속과 초가집 그림을 보면 전설이 떠오르고 지금은 주인공이 없는 할아버지 댁의 빈 사랑 생각에 추연해진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멀지 않던 2월, 바깥 기동을 못하던 할아버지는 뒷산에 눈이 첩첩이 쌓여 까치도 못 날던 날 아침 운명하시고 말았다. 차가운 눈 속에서도 피어난다고 애써 가꾸시던 매화의 봉오리가 곱게 벙글고 병풍 속의 매화도 피어 있건만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리지 않아 툇마루에 앉아서도 허무하던 기억.

 열두 폭의 그림 중에서 몇 폭의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아 안타깝다. 꼭 필요한 것도 아닌데 집착이 가서 정작 구경하러 온 전시회의 그림을 몇 개씩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나는 다시 발길을 멈춘다. 신라의 솔거가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살아 있는 것처럼 잘 그려서 ​새가 앉으려다 떨어졌다는 얘기에 감탄한 일이 있다. 나는 그 생명력 있던 그림을 상상하다가 한 그림 앞에 우뚝 서고 말았다. 바로 이거다. 옛날의 그림이 사실적인 생동감이었다면 요즈음 그림은 또 다른 창조로 우리 서정을 부를 수 있는 게 아닌가? 나무가 새를 부르는 영감보다 더욱 높은 차원의 맥락脈絡이, 화가가 그린 영상과 우리 영혼 사이에 이어질 수 있는 예술의 극치, C화백의 역작 앞에서 머뭇거린다.

 우리는 높은 예술의 감동 앞에서 차분히 기억해 보면 결코 남의 것이 될 수 없던 순간들이 숨쉬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외한이기 때문에 색채만 있고 형상이 없는 것 같은 현대화를 보며 남겨지는 의미를 아쉬워한다. 그래서 그림 보기를 꺼리는 내 앞에 이따금 화사하게 혹은 신비롭게 꾸며진 화폭이 눈에 뛸 때 나는 그림 전시회에 온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춘하추동의 열두 달을 병풍 속에 담아 작은 세월과 우주의 축도縮圖로 어느 인생의 머리맡에서 증인이 되기도 하고 울타리처럼 지켜준 병풍, 화려한 색채도 없이 담묵과 엷은 색채를 곁들인 것으로​ 격이 높은 그림도 아니었다고 기억된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우주 안에서 할아버지가 가끔 갈아 놓으시던 묵향처럼 은은한 정서의 향기가 내 의식 속에 배어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그분의 생애는 열두 폭 병풍에 그려 둘 만큼 훌륭했거나 다채로운 모습이 아니었지만 병풍 앞에서 들려주신 얘기가 내게는 권선징악의 교훈이었고 보다 높은 차원으로의 일깨움이었다. 충 효 예 지 신의 토막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인간의 빛나는 모습과 향기를 찾아 산수도에 보이는 좁은 길 같은 오솔길을 찾는 버릇을 지니며 자게 되었다.

 결코 병풍 안쪽에서만 아늑하게 살아갈 수 없는 너무나 넓은 우주 안에 우린 살고 있다. 대단할 것도 없는 꿈을 이룩해 온 나만의 밀실인 병풍 안쪽에서 그림들을 보며 자연과 인간사에 애정 어린 눈길을 다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한 일이다.

 우리가 타고난 열두 폭의 능력 중 접혀 있는 폭을 펼치고, 보다 다양해진 형상 앞에서 먼 지표를 향해야 하는 자기 계발의 의무가 과제로 안겨 온다. 어릴 때 열두 폭 병풍 앞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었던​ 동심을 회복할 수 없어서 멀기만 한 길.

 그림을 보며 아직도 신비한 욕심을 찾으려는 미술감상의 실격자로서 고차원의 빛깔로 이미지를 구축한 힘찬 예술 앞에서 당황하기도 한다. 이따금 옛 것의 환상에 빠져서 엉뚱한 그림 앞에 멈춰 있는 나를 두고 친구들은 내가 무척이나 그림 애호가인 줄 알고 먼저 전시회장에서 나가버리기가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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