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바꼭질
최민자
골목 안에 늘 있던 밥집을 찾지 못해 헤매는 날이 있다. 백화점 주차장을 몇 바퀴씩 돌아도 보이지 않던 내 차가 어느 순간 화들짝 눈에 띄기도 한다. 사물들도 숨바꼭질을 하는가. 해는 산 너머로, 달은 구름 속으로 숨고, 바다와 들판도 밤마다 먹빛으로 지워졌다 살아난다. 신은 하늘 위에 숨고, 본질은 현상 뒤에 숨는다. 역사 또한 시간의 강 너머로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환하게 빛나고 싶다가도 아득하게 숨어버리고 싶은 건 내 변덕만이 아니라는 거다.
숨바꼭질은 집안에서도 계속된다. 덩치 큰 것들은 점잖음을 빼느라 비교적 그런 장난을 삼가는 편이지만 서랍이나 손가방, 주머니 안에 사는 조무래기들은 신출귀몰하는 새끼 도깨비 같다. 작은 방 서랍 안에서 얼차려 중이던 손톱깎이가 거실 탁자 위에서 뒹굴고, 부엌장 안의 차 숟가락도 열이 되었다 열둘이 되었다 한다. 며칠 전 그리도 찾아 헤매던 귀이개는 프린터 밑바닥에 얌전하게 엎드려 있었다. 숨바꼭질이 끝난 줄도 모르고 헛간 깊숙이 잠들어버린 어린 날의 친구처럼. 출고된 지 반세기가 넘어 진즉 기억 회로에 이상이 생긴 나도 자주 그것들의 술래 노릇을 한다. 어딘가에 착실히 넣어 두었을 계약서나 반지 따위를 찾느라 장롱 안을 몽땅 뒤집어엎고, 좀 전까지 쥐고 있던 열쇠의 행방을 몰라 수선스레 맴을 돌기도 한다. 망각의 늪 속에 빠뜨려버린 기억 하나를 건져 올리려고 케케묵은 수첩을 뒤적거리다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몰라 대낮의 거리를 서성이곤 한다.
숨는 일에는 이골이 난 이 일상의 잡동사니들은 시시때때 차출하여 호시탐탐 부려먹는 오만한 인간들을 적당히 놀리고 골탕 먹일 줄 안다. 잠깐의 방심을 틈타 줄행랑을 쳐버리거나 낯가림도 없이 아무나 따라붙어 멋대로 자리를 옮겨 앉기도 한다. 일하기 싫은 날에는 자벌레나 가랑잎나비처럼 보호색을 쓰거나 위장 전술을 사용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것도 같다. 아무려나, 저간의 정리를 배신하고 의리 없이 떠나버리는 무정한 종자들에 비하면 엉뚱한 곳에 틀어 박혀 있다가 시효가 한참 지나버린 후에 태연스레 나타나는 얼뜨기 새침데기들은 그나마 양심이 남아 있는 편이다. 겉보기엔 냉담해도 부르면 냉큼 화답하고 나오는 손 전화가 가장 심약한 편이라고 할까. 후미진 틈바구니나 가방 귀퉁이에 내색 없이 숨어들었다가도, 십리 밖, 주인의 노크소리에 조차 '나 여기 숨었소.' 울면서 떨면서 투항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친한 척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때 없이 배신을 일삼는 믿지 못할 친구가 돋보기이다. 저 없이는 금새 까막눈이 되어버리는 딱한 처지를 모르지 않을 텐데도 하루에도 몇 번씩 숨어버리곤 한다. 금방 전에도 그랬다. 현관에서 우편물을 건네받고 돌아온 잠깐 사이에 녀석이 또 사라져버렸다. 책상 위에도, 식탁 위에도, 거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메스너의 고비사막 여행기를 이제 막 맛 들여 읽기 시작했는데. 광활한 세상을 눈으로만 건너지 말고 발바닥으로 땅 짚으며 활보하라는 건가. 아니, 이즈음 녀석의 잦은 숨바꼭질은 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존재의 허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숨는다는 것은 때로 존재감을 극명하게 확인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전략일 수 있을 테니까. 뱃심이 없어 실패하긴 했지만 나 또한 그런 시도를 해 본적이 있다. 사소한 부부싸움이 자존심 대결로 치달아 내 안의 뚝방이 무너져 내리던 날, 가만히 대문을 밀치고 나왔다. 더 머물 자리가 없어 보였다. 남의 속을 질러 놓고 텔레비전 소리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들어 앉아 있는 남자와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었다.
밤은 이미 깊었고 갈 곳은 없었다. 손에 쥐고 나온 것은 손 전화와 열쇠뿐. 차를 몰고 가까운 한강 둔치에 나갔다. 강 가까이 차를 대고 번질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마음에는 굳은살이 박이지 않는 법인지 허공에 작렬한 파편 하나에도 생채기가 나고 분화구가 파인다. 홀로 환부를 핥으며 고통을 삭이는 들짐승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내 안의 회오리와 마주 앉았다. 밤물결이 가만가만 강기슭을 핥았다. 밤은 길었고, 추웠고, 어두웠다. 주머니 속의 손 전화는 차디차게 침묵했다. 꺼둔 전화만큼도 모질지 못했던 나는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몇 번인가 켰다가 껐다. 동 트기 전, 다시 문을 밀고 들어선 것은 지전 한 닢 챙기지 못한 불안감 때문이 아니었다. 상처 받은 자존심이 견딜 만해서도, 발치 아래 허방이 두려워서도 아니었다. 다 큰 딸들에게 어미의 뒷모습을 아프게 기억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룩하고 갸륵한 모성 때문이었다.
그 낭패감, 그 배신감..... 식구들 모두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누구도 내가 그 밤 내내 그렁그렁한 강물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빈 거실에 고즈넉이 출렁이던 정적처럼, 이십 몇 년 만의 내 가출은 그렇듯 무르춤하게 끝이 나버렸다. (*무르춤하다= 뜻밖의 사실에 가볍게 놀라 갑자기 물러서려는 듯이 행동을 멈추다.)
부재가 확실한 존재 증명이 될 때까지, 돋보기는 조금 더 시간을 끌 모양이다. 아무렴 나보다야 계산이 밝겠지. 주인을 무시로 갖고 노는 걸로 보아 내 머리 꼭지 위에 올라 앉아 있을 테니. 책장을 덮어 저만치 던져두고 공원이나 한 바퀴 돌아 올 양으로 화장대 위에 놓인 썬 캡을 집어 든다. 그런데 이런! 그렇게 찾던 돋보기가 헤어밴드처럼 머리 위에 번쩍 올라붙어 있는 게 아닌가. 겨울 속에서 여자가 웃는다. 나도 따라 실소를 한다. 업은 아이 삼 년 찾기다.
부드러운 융 조각으로 안경알을 닦으며 트로트 한 소절을 물색없이 주절댄다.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그러니까가 아니라 그래 보니 알겠다. 삶이 천 가지 숨바꼭질인 것을. 숨고, 찾고, 달아나고 쫓아가며 살아내는 일생. 신은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크고 작은 보물들을 시간의 주름 사이에 은밀하게 숨겨 두고 하나씩 둘씩 찾아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꿈꾸고 좌절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엇모리장단 속에서, 그 긴장과 이완의 리듬 사이에서, 삶은 깊어지고 탄력을 받는 것이리라. 기실, 우리가 일생을 통해 찾아 헤매는 행복이라는 것도 남의 눈엔 보이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머리 위의 돋보기 같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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