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수필

천자문 / 정여송

희라킴 2017. 3. 4. 14:37




천자문 


                                                                                                                                          정여송


 千 개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은다. 구백구십구 개도 안 되고 한 개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개라야 한다. 그것을 메고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못한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 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무지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책임과 의무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 차서 넘친다.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字판을 두들긴다. 상상의 줄이 끊기니 손가락도 따라 쉰다. 아무리 타자치는 속도가 빠르다 해도 생각이 앞서지 않으면 허사다. 이야기 길을 뚫으려 자판을 들여다본다. 새로운 사실이 보인다. 세상이 천자문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자판 위에도 있지 않은가.

 

 있다, 있어. 모든 것이 있다. 육친과 내 곁에 머물던 사람들의 정이 있고, 어릴 적의 봉이와 경옥이와 명자가 있다. 천사의 아름다운 노래와 악마의 화려한 춤이 있다. , 바람, 구름, 기쁨, 슬픔으로 돌고 도는 계절이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고, 마음속 깊이 흐르는 강물이 있다. 유행가 가사도 있다.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남'이 되고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빼면 도로 '님'이 되는 인생사라나. 웃음과 울음이 있다. 육체를 치유하는 힘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도 있다. 희망의 길을 가리키는 금빛 이정표가 있다. 온갖 삶의 근본이 쫙 널려 있다. 백여섯 개 자판에 또 하나의 우주가 있다, 있어.

  

 文을 세운다. 건축가가 되어 집을 짓는다. 닮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겉모양만 다르게 줄지어 선 카페들은 질색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멋을 아는 사람은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외형보다 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말을 걸 듯 겸손하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 그런 글집을 짓는다. 그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등의 평가가 아니다. 언어를 다듬어서 집을 짓는 즐거움이고, 마음속에 진득하게 똬리를 튼 생각의 짐을 벗어 버리는 해방감이다.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녕 엽기다. 가로 열쇠와 세로 열쇠를 풀어 가며 퍼즐 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뚝딱 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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