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눈 온 날 소묘
박월수
밤새 눈이 내린 날은 아침이 빨리 찾아왔다. 희뿌연 창호지 아래 머리맡을 더듬어 어제 벗어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어둠을 밀어낸 하얀 마당에 나서니 아직 덜 기운 달은 창백한데 일찍 눈 뜬 새들은 춥지도 않은가 보았다. 앙상한 감나무 사이를 재재거리며 떼 지어 오르내렸다. 벼르던 새덫을 놓기에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나는 헛간으로 가서 삼태기라 불리는 삼각형 모양의 짚소쿠리를 내어 왔다. 어린 내가 들기엔 꽤나 묵직했다.
키 낮은 막대기에 새끼줄을 묶은 후 삼태기를 받쳐 세우고 구멍 난 뒤주에서 꺼낸 나락 한줌을 뿌렸다. 그런 다음에 풀풀 피어나는 입김으로 곱은 손을 번갈아 녹이며 새끼 끈을 잡고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젠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가장 배고프고 순진한 녀석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몇 놈이 잡힐까 궁리 중인데 하필 그때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내 볼을 털목도리로 감싸주며 뒤덤마을로 심부름을 시켰다. 홀치기가 끝난 비단을 가져다 주고 새 비단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다. 이번 홀치기는 얼마나 까다롭던지 기한을 훌쩍 넘겼다고 하셨다. 그러니 새로 받아올 비단은 필이 짧고 모양이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도 목도리만큼이나 꼭꼭 여며 주셨다.
그 말을 전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글자도 모르는 꼬맹이에게 남의 집을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비단 쟁이 아줌마의 집은 어머니를 따라 두어 번 가본 것이 고작이었다. 동내 끝에 덤으로 매달린 자투리 마을은 우리 집에선 먼 길이었다. 두 개의 공동우물을 지나 길고 굽은 골목 어디쯤에 푸른 양철대문을 한 그 집이 있었다.
어쩌다 잠결에 목이 마를 때나 아래가 급해서 눈을 뜨면 어머니는 언제나 비단 틀을 마주하고 앉아 계셨다. 밤잠을 못자고 바늘에 손이 찔려가며 홀치기를 하신다는 걸 어리지만 진즉에 눈치 챘었다. 몇 달에 걸쳐 완성한 비단을 넘겨주고 받은 품삯도 호기롭게 쓰지 못하는 것마저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농한기의 농촌은 집집마다 돈이 궁했다. 그러니 까짓 심부름쯤은 씩씩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들길을 한참 걸어 뒤덤마을로 갔다. 아무도 걷지 않은 이른 아침 눈길은 더디고 멀었다. 골목을 따라 기억속의 그 집을 찾느라 오래토록 헤맸다. 몇 바퀴를 돌고 돌아도 낯익은 대문은 보이지 않았다. 보따리를 쥔 손은 발갛게 시려오고 눈 속에 빠진 신발은 이미 다 젖어 발끝이 아팠다.
간간히 마실 나온 어른들과 마주쳤지만 집을 묻기가 쑥스러웠다. 싸맨 볼마저 얼얼해질 즈음 왔던 길을 도로 돌아 집으로 왔다. 같은 골목을 연방 헤맨 내 얘기를 끝까지 들은 어머니는 그제야 내가 헤맨 골목 말고 다음 골목에 비단 쟁이 아줌마네 집이 있다고 일러 주셨다.
따뜻한 구들 목에 언 발을 녹이고 어머니가 양손으로 비벼주신 볼에 풀었던 목도리를 다시 여몄다. 분명하게 찾아가는 그 길은 멀지도 더디지도 않았다. 선명한 발자국을 되짚어 한달음에 파란 양철 대문 앞까지 갔다. 눈 온 마당을 쓸던 비단쟁이 아줌마는 대문 밖을 서성거리는 자그마한 아이의 보퉁이를 안 봐도 안다는 듯 넌지시 받아 안았다. 모양이 단순한 짧은 비단 한 필을 받아 안고 나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햇살은 퍼져 이마가 따뜻했다. 감나무 아래 내가 놓아둔 덫에는 겁 없는 새들이 오글오글 모여 나락을 쪼고 있었다. 종종거리며 뛰어가 새끼줄을 잡아당기니 나를 비웃듯 포르릉 날아가고 삼태기만 저 혼자 맥없이 엎어졌다.
나는 가끔 어린 날에 엉뚱한 골목에서 헤매었듯 내 인생의 길도 다른 곳에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제대로 된 길 하나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데 엉뚱한 길 위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찾는 파란 대문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을 때 바른 길을 알려줄 누군가가 있는데도 바보처럼 그냥 지나치는 건 아닐까. 삼태기를 세워놓고 요령 없이 참새를 기다리던 어린 날처럼 그렇게 살다가도 올 겨울처럼 춥고 눈이 많은 이런 날에는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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